한 번만 뜹시다 ( A5 | 24p | 성人 )
하이큐!! || 오이카와 토오루 X 스가와라 코우시
[ 4,000원 ]
!!!Trigger Warning!!!
납치, 감금 묘사가 있습니다.
납치당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저것이었다. 자각하기 무섭게 전신의 신경이 바짝 날카로워졌고, 등줄기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아직까지 코끝을 찡하게 자극하는 약품이 머릿속에서 팽이질 치느라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렇다고 정신이 바짝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시야는 이미 포근한 무언가로 빛줄기 하나 새지 않도록 단단히 감겨있는 데다 두 손과 두 다리 또한 꽁꽁 묶여있었다. 슬쩍 힘을 주고 당겨보자 역시 손목만 옥죌 뿐 풀어질 기미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힘을 가하는 동안 점차 의식이 또렷해지던 오이카와는 그제야 묘한 이질감을 깨달았다.
‘이거 납치……맞지?’
아무리 약품 때문이라고 한들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는 시도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렸다. 즉, 오이카와가 정신을 잃은 시간이 제법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약간 조이듯 결박된 부위 말고는 뻐근하거나, 아리거나, 아픈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일단 오이카와를 앉힌 의자부터 너무나 편안한 각도로 기울어져 포근하기까지 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허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비스듬한 각도의 의자는 오이카와도 익히 잘 아는 소위 무중력 의자가 분명했다. 그 위에 막 세탁한 듯 빳빳하면서도 포근한, 심지어 오이카와가 사용하던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담요가 위아래로 덮여있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오이카와의 눈을 덮은 안대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묘하게 마음이 진정되는 아로마 향과 함께 한겨울 코타츠에 깔아놓은 방석처럼 후끈후끈한 열감이 영락없는 온열 안대였다.
‘납치는 납치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납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오이카와는 황망함마저 느꼈다. 그렇다고 거친 대우를 원하냐면, 결단코 아니었으나 백 보 양보해서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둔 매체를 조금만 훑어보더라도 납치란 이런 식의 헌신적인 무언가가 느껴지는 일이 아님을 오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빛도 통하지 않아 어두컴컴한 지하에 똑, 똑, 습기 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공간을 떠올려보았으나 지금 오이카와의 몸에 달라붙은 온기와 포근함이 한층 더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귀를 쫑긋 세워보면 생활소음은 고사하고 밖에서 들려오는 흔한 오토바이나 자동차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물 떨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게다가 덮고 있는 담요를 통해 닿는 따끈한 햇살의 감촉이 오이카와에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여기 건물 자체가 남향집이라 얼마나 목이 좋은데요, 고객님! 고민하시다가 집 다 빠져요!
그렇지않아도 며칠 전에 새집을 보러 돌아다니던 오이카와의 귀에서 생생한 기억이 서라운드로 울려 퍼질 때 즈음,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무언가 가로막힌 잡음은 아무리 들어도 그저 나무 재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또렷해졌다.
“……!”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을 들이켜는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상대방은 오이카와가 깨어났음을 기막히게 알아챈 것이다. 눈치를 읽기도 전에 들켜버린 이상, 더 정신을 잃은 척 연기해봤자 역효과만 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상대방보다 시각이 닫히고, 사지가 묶여 억류된 상태이니 한참 불리했다. 게다가 상대방이 총이나 칼을 들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평범한 사람, 혹은 연예인 따위가 아니라 현역 배구 국가대표라는 타이틀 또한 쉬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그의 선수 생명 자체에 위험이 생길 것이다. 오이카와는 꾹 쥔 주먹에서 순순히 힘을 풀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서브 직전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후우우.”
“저기…….”
말했다!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외침을 가까스로 삼켜낸 오이카와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더듬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또 한 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찰나나 다름없었던 탓일까, 오이카와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부터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쉬이 목소리를 들려줄 거로 생각지 못한 탓도 컸다. 보통 음성 변조 앱을 쓰거나 적어도 마스크로 가리던데, 이 납치범께서는 자신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저기,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
오이카와는 그가 건넨 질문보다 목소리를 듣는 일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잔뜩 집중하느라 꾹 다문 입술에 무언가 살그머니 닿더니 조심조심 문지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손가락?’
손톱 끝을 깔끔하게 잘 다듬은 손가락은 익숙한 굳은살이 잘 박여있었는데, 확실히 여성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 또한 오이카와 못지않게 잔뜩 경직한 남성이 분명했다. 그 의중을 물어보기도 전에 입술에 닿은 손가락은 한참을 살살 움직이더니 오이카와가 입술에 힘을 풀어서야 떨어졌다.
“빵을 더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식사는 식사잖아요. 그래서 밥을 좀 차려왔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 잔잔한 훈계였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분명 이런 형태의 훈계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절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어디선가 들어봤다는 기억에서 이어진 소름을 숨기지 못해 바르르 떨린 전신을 아마도 상대방은 고스란히 보았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오이카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숨도 쉬지 않고 몰아치듯 물었다.
“혹시 추워요? 여기가 제일 볕이 잘 드는 방인데 어떡하지? 오이카와씨 추위 많이 타는구나. 미안해요. 잘 몰랐어요…….”
다시금 오르려던 소름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걱정에 별안간 안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더 흥분하면 도리어 침착하게 된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한층 더 차가워진 냉정에 침착함을 더했다.
어렴풋이 짐작하기야 했으나 그는 오이카와의 팬이 확실했다. 단순히 금전과 퍼포먼스를 위한 납치가 아닌 이상, 목숨을 위협받을 확률은 줄어들지라도 섣불리 잘못 자극한다면 꽤 골치 아플 것은 자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배구는 물론이오, 평소 행실 거지에서까지 제법 임기응변에 능한 오이카와라고 한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네.”
계속 정신을 잃은 상태에다 긴장까지 겹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어 부르자 직전과는 다르게 더없이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이카와는 일부러 잔뜩 지친 기색을 담아 투덜거렸다.
“도대체 뭐가 목적이에요?”
조금만, 조금만 더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 하나만이 박혀 있어 그의 다음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서서 집중하는 찰나, 상대방이 살짝 숨을 들이쉬고 냅다 소리쳤다.
“저랑 한 번만 뜹시다!”
“…….”
호흡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실은, 얼굴이랑 몸이랑 으악, 방금 진짜 변태 같았다!”
지금도 썩 정상인 같지는 않습니다만! 오이카와는 열심히 주워들었던 혼잣말이 모조리 증발해버린 진공상태의 머릿속에 오로지 한 번만 뜨자는 메아리가 무한대로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목 끝에서 덜렁거리는 외침을 꿀꺽 삼키고서도 상대방은 쉴 새 없이 자신의 요구를 피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이카와씨 고교배구 때부터 정말 너무 팬이었는데, 얼굴이랑 스타일만 너무 제 취향이라서, 진짜 딱, 딱 한 번만 뜨면 세상에 미련이 없을 것 같아요!”
‘이와쨩, 나 좀 살려줘. 이건 진짜 무서워. 어떡해.’
절박한 심정은 목소리로 나오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오이카와의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지금까지 오이카와를 지켜보고, 흠모했던 서사를 풀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쪽 귀를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쪽 귀로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말들을 오이카와는 헛숨만 연신 들이키며 어떻게든 이해 회로를 돌려보려 애썼다. 그리고 튀어나온 말이라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기가 찼다.
“……그래서 정말 한 번이면 돼?”
나도 미쳤네. 행여나 죽을까 봐 본능적으로 튀어나갔던 존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로도 모자라 도리어 한 번으로 만족하냐며 되물었다. 문란하다 못해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평소 행실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며 땅을 치고 후회해봤자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공인이 되면 가십을 피하느라 본인이 조심하기 마련이건만, 오이카와는 그 조심성을 주변인들에게 떠넘기는 편이었고, 그 최대의 피해자는 매번 질리지도 않고 기꺼이 오이카와에게 매타작을 손수 선물해주곤 했다. 너 그러다 언젠가 진짜 벼락 맞는다, 이눔시키야! 고교배구 강호고 에이스급 등짝 스매시가 갑자기 그리워지는 오이카와였다. 정말 우리 엄마 같다며 깔깔거리고 놀리던 잔소리가 정말 현실이 되어 지금의 오이카와를 히죽 놀려대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 이와쨩 말 좀 잘 들을걸. 뒤늦은 후회를 주억거려봤자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돌이킬 수조차 없이 멀리 와버렸다.
“좋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솔직하고 냉정하게 판단하건대, 현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은 명언을 억지로 끼워 맞춰 상기시킨 오이카와는 어깨까지 으쓱이며 빠르게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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