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미식협 [해7a] 에서 나올 '오! 나의 배우님!' 2차 샘플입니다.

별도의 선입금예약은 없으며 수량조사에 최대한 맞춰 현장판매와 행사 이후 통신판매로만 진행합니다.

현재 표지는 준비중에 있어 완성 되는대로 정리된 인포와 함께 뵙겠습니다.


>>>수량조사 바로가기(~17일까지)<<<



3.


 김독자는 퍽 민망한 상황에 부닥쳐있었다. 물론 본인이 자초한 결과지만 그래도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을 만큼 민망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듯이 그는 어떻게든 시간에 맞추려고 바로 오늘 아침까지 격무에 시달렸다가 튀어나오느라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전날, 퍽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잘 차려입은 일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막상 주변의 시선들을 빌어보자면 약간의 역효과도 있는 듯싶었다. 


 아니지. 가장 정확한 시선 강탈범은 아마도 김독자가 품에 안고 있는 이 꽃다발일 것이다. 커피와 자양강장제가 뱃속에서 한 데 섞여 몽롱한 반각성 상태였던 김독자는 모든 기안서 검토를 끝내놓았으니 오늘은 본인을 찾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부리나케 탈출하는 즉시, 출퇴근길 오며 가며 눈독 들였던 꽃집으로 향했다. 이제 막 화분들을 하나둘 내어놓으며 물을 주느라 여념이 없던 점원은 그런 김독자의 행색에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이어서 꽃다발을 사러 왔다는 용건에 또 한 번 놀라버렸다.


 그야 당연했다. 행색은 멀끔할지 몰라도 짙게 드리운 눈그늘 하며, 표정까지 ‘상태가 영 아니올시다’를 문장 그대로 표현한 남자가 가게 문 열자마자 꽃다발을 사러 왔다며 쫓아왔는데, 어느 누가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오늘 제일 싱싱하고 예쁘게 핀 거로 만들어 주세요.”

 “여자분에게 선물하시나요?”

 “아니요, 아, 선물은 맞는데 남자요.”

 “……그럼 크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잠시 점원이 당황한 듯 말을 잠시 머금었다가 다시금 물었다. 김독자는 그런 소소한 착각에 연연하기는커녕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점원이 보여주는 꽃다발 치수를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가장 안쪽 웬만한 중형 꽃바구니 크기만 한 다발을 가리켰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실내 장식용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을 그것을 김독자는 매우 태연하게 그리고 진심인 양 점원에게 요구했다. 그걸 옳다구나 바로 주문을 받을 수도 없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이거 손님 품에도 꽉 찰 정도로 큰데, 그래도 괜찮으실까요? 거기다 60만 원대로 금액도 엄청 높아지는데…….”

 “네. 그 크기로 만들어 주세요.”



 번복은 없었다. 김독자는 오히려 더 상쾌한 얼굴로 얼핏 미소까지 곁들여가며 가게 안쪽으로 성큼 들어섰다. 주변 가득 물기를 머금어 한층 더 싱싱해진 꽃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품새를 보아하니 점원은 오늘 첫 손님부터 엄청난 게 걸렸다며 속으로 환호 반, 귀찮음 반이 아우성치는 기분인지 표정관리가 약간씩 늦어지는 듯 보였다. 


 기어코 가장 싱싱하고 예쁘게 핀 꽃을 고르는 점원의 손에 따라붙어 요모조모 상한 곳은 없는지 꼼꼼히도 둘러보던 김독자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품에 넘쳐 흐를 듯 몇 종류의 꽃가지가 안겨서야 만족한 듯 의자에 앉아 포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관심은 슬그머니 자리 잡고 앉은 궁둥이처럼 순순히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직원의 손이 꽃다발을 두를 포장지 사이를 헤매는 동안, 그의 눈 또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나 싶더니 냉큼 고개를 저으며 버럭 목소리를 높아졌다.



 “그거 말고 바로 뒤에!”

 “네?!”

 “……있는 포장지가 나을 것 같아요.”



 화들짝 놀란 나머지 튀어나온 새된 점원의 단말마에 덩달아 놀란 김독자는 어색하나마 얼른 평이하게 톤을 낮추려 노력했으나 바닥을 찍은 이미지까지는 회복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점원도 겨우 다시 미소를 되찾기는 했으나 그녀의 손은 김독자가 정해준 포장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후, 또 하릴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투명한 비닐을 집었다가 불투명한 레이스 무늬가 들어간 비닐을 집었다가 정처 없이 눈 없는 손이 길을 잃었고, 김독자는 그것을 너그러운 손님의 시선으로 관망하기엔 진작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진상 팬이었다.



 “깔끔하게 투명한 비닐로 제일 안쪽에 감아주시고요. 맨 겉면은 아까 집은 연하늘색이랑 어울리게 남색이 좋겠어요. 네, 그거요. 제일 짙은 거. 그리고 리본은 골드 펄로요. 그리고 카드도 쓸게요. 봉투 색은 그냥 무난하게 흰색으로 주세요.”



 어째 퇴근을 했는데도 다시 회사로 돌아온 기분에 김독자는 쓴 입맛을 다시며 안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김독자가 앉은 테이블 위로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봉투와 카드가 내밀어졌다. 동글동글한 양각으로 레이스와 장미무늬가 박혀있는 카드를 뒤집어 만질만질한 부분을 엄지로 무심코 쓸어보던 그는 여기까지 왔으면서 괜스레 후회가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완전 팬이에요!’


 그도 그럴 듯이 이렇게 잠시나마 눈을 지그시 감으면 아직까지 귓가에 한적한 주말 오후의 공원에 쩌렁쩌렁했던 제 목소리가 빙글빙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다. 팬은 팬이지, 그것도 사생팬 못지않게 징글징글한 진상팬 말이다. 자연스레 되짚어진 회상은 만년필 뚜껑을 열던 김독자가 난데없이 머리칼을 쥐어뜯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옛말에 첩첩산중, 설상가상이라 했다. 선인들의 말씀은 거의 아귀만 갖다 맞추면 웬만한 예언 못지않다지만, 이렇게 얄밉기까지 할 일 인가 싶었다.


 그러니까 한수영의 표현을 빌려 ‘김독자 고성방가 팬밍아웃 사건’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시국에 하필 유중혁의 생일이 코앞이라는 사실은 하늘이 김독자의 팬심을 시험하는 것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이없이 맞아떨어진 이 빌어먹을 우연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가 심즈를 굴려도 이보다는 훨씬 더 나을 거라며 신이라는 플레이어를 욕해보았자 변하는 건 없었다. 김독자는 팬이라며 고래고래 온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오늘은 유중혁의 생일이다. 


 그리고 김독자는 팬으로서 처음으로 맞는 중요한 오늘을 소득 없이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꽃다발 준비 다 되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결제는 이걸로 해주세요.”

 “68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할부는―”

 “일시불이요.”

 “…네.”



 이제야 겨우 만년필을 고쳐 잡은 김독자에게서 신용카드를 받아 든 점원은 무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표정 위로 미소를 덧씌웠다. 이어서 그녀의 시선은 이제 겨우 딱 한 줄 적은 카드 위로 떨어졌다.


 유중혁 씨에게.


 딱딱하게 적은 상투 어구에 선뜻 같이 굳어버린 점원을 향해 김독자는 카드를 한 손으로 깔끔하게 구겨버리며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일 순 없었으나 민망한 시선을 피하기에는 적격이었다. 덧붙여 첫 문장을 생각할 시간도 벌었다.


 To. 유중혁.


 제일 무난한 시작을 한고비 넘기자 다행스럽게도 다음 이어지는 말은 술술 써졌다. 사각사각 종이를 긁으며 검은 잉크가 물들어 완성된 한마디 말로써 비로소 썩 괜찮은 생일 축하 카드가 완성되었다. 요 며칠 계속 귓가에서 놀려대던 환청은 어디 가고 뿌듯함만이 남아 김독자는 피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짜식. 그래도 생일이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이윽고 영수증과 함께 되돌아온 신용카드를 받아 챙긴 김독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얀 봉투에 생일 축하한다는 짧은 글귀가 적힌 카드를 한 번 더 봉하고 그대로 완성된 꽃다발 속 캄파뉼라와 장미 사이 안쪽에 끼운 그는 테이블에 남은 영수증을 본 체도 하지 않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래, 딱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김독자는 더할 나위 없이 신이 난 상태였다. 마치 유중혁을 찍을 새 렌즈를 지르고 돌아오던 바로 지난 주말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엔딩은 구태여 다시금 떠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창피한 기억인지라 김독자는 얼른 생각을 전환했다.


 행여 흐트러질까 조심조심 품에 안은 오늘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은 보기만 해도 흐뭇했고, 향기만 맡아도 산뜻해졌다. 그렇게 구름을 걷는 듯 사뿐사뿐하기만 했던 그 발걸음은 정확히 그리 크지 않은 빌딩 숲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1톤짜리 무게추를 단 것 마냥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무심코 욕지기가 튀어나오기 충분하리만치 비용대비 극악인 도심 한복판의 주차비용을 곁눈질하면서도 주차권을 받아든 김독자는 그 잠깐의 찰나,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를 한발 늦게 고민했다. 차라리 꽃집에서 바로 퀵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을, 바로 눈앞에서 완성된 꽃다발이 예상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서 너무 들떠버린 탓이었다. 오만가지 후회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와중에도 착실히 빈 자리를 찾아 무사히 주차를 끝낸 김독자는 그대로 핸들에 머리부터 박아버렸다. 그리고는 연신 한숨을 털어놓는가 싶더니,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백미러 너머로 마주친 제 얼굴에 대고 냅다 욕부터 쭝얼거렸다.



 “저번 주에 완전 이상한 사람으로 도장 찍혀놓고 뭐가 그렇게 신난 거냐, 멍청아. 어휴…….”



 자책에 한탄을 실어 투덜거린 그는 여전히 핸들을 쥔 손에 꾹 힘을 주고는 또 한 번 냅다 머리를 박아버렸다.



 빠아아아앙――!!

 “―악! 깜짝이야!”



 이보다 더 멍청할 순 없었다. 아무리 실의에 빠졌다지만 핸들 한가운데에 이마를 들이박은 거로도 모자라 스스로 놀란 나머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기까지 했다. 본 사람도 없을 텐데 목은 물론이오 귀까지 붉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얼결에 땀을 쥔 손바닥으로 역시 식은땀이 살풋 맺힌 이마께를 슥슥 닦아낸 김독자는 끄으응 앓는 소리까지 스스럼없이 내더니 이번엔 뒤로 고개를 젖혔다. 그래 봤자 오만 걱정 탓에 뻐근해진 뒷목이 시원하게 풀릴 일은 없었고 대신 뒷통수가 살짝 저렸다. 이마에 올려놓았던 손을 그대로 살짝 내려 눈가를 덮어버린 그는 질리지 않은 한숨만 연달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물러? 말아? 그냥 눈 딱 감고 가? 다른 사람 시켜서 부탁해? 잠깐, 부탁?



 “아! 경비한테 맡기면 되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던 생각의 연쇄는 문득 떠오른 동아줄 하나에 얼른 그 궤도를 달리했다.


 제법 그럴듯한 구색이 차곡차곡 갖추어지자 실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너무 큰 나머지 조수석에 모셔놓았던 꽃다발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공들여서 꺼내는 순간, 잠시 가슴 한쪽에 쭈그러져 있었던 공허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도대체 내가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


 그러나 그 질문이 마저 끝을 겨누기도 전에 김독자 본인의 필체로 또박또박 적힌 ‘유중혁’이라는 이름 하나가 그 허무를 단숨에 채웠다. 거기다 어렴풋이 하지만 자연스럽게 미소부터 흘러나오게 김독자를 홀렸다. 고작 이름 하나만으로, 그것도 자신이 쓴 이름 하나만으로 말이다.


 아침 해가 밝자마자 거의 직접 고르다시피 참견하고 진상 피워가며 한 아름의 꽃다발을 샀다. 그리고 여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설레기만 해서, 그러는 와중에도 행여나 꽃이 망가질까 조심조심 운전해왔다. 즉, 물러나기엔 한참 늦었다는 뜻이었다. 어찌어찌 번민하는 몸뚱이를 끌고 주차장에서 나와 유중혁의 소속사 빌딩까지 터덜터덜 걷는 내내, 김독자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궁금증으로 점철된 관심들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땅바닥만 주시하며 무거운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야트막한 후회와 자기 위로를 거듭하던 김독자는 익숙한 로고를 마주하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스타 스트림, 대한민국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한참 뒤에 회사가 더 성장하고 나서야 광고 모델을 위해 마주할 줄 알았던 이곳에 김독자가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의 생일선물을 전해주려고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만큼 마냥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저기 진짜 이것만 전해주세요. 이거 보세요. 그냥 꽃다발이라니까요.”

 “우린 이런 거 안 받아준다니까, 글쎄!”



 그렇지 않아도 근방에 기획사만 잔뜩인 동네인지라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부터 상당히 민망하건만, 품에 가득 차고도 남는 꽃다발까지 신줏단지처럼 소중하게 안고 돌아다닌 탓에 김독자의 민망함 수치는 한계를 넘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 단순히 경비에게 맡기면 될 것이라 믿었던 계획은 바로 코앞에 완결을 두고서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쯤 큰 기획사라면 따로 팬레터나 선물들을 관리하는 부서라도 있을 텐데 미리 찾아볼 것을 또 사서 고생했다며 김독자는 심란한 마음에 꽃다발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진짜 그냥 이것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아니면 담당 부서로 전달이라도…….”

 “아, 거 참! 누구 줄 건데 자꾸 이러는 거요?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그, 뭐냐, 안나 크로프트요? 그 아가씨야?”

 “아뇨! 유중혁이요!”

 “유, 뭐? 그런 이름이 여기 있었나?”



 그저 가벼운 실갱이로 끝이 났더라면 참으로 편할 일을 김독자의 팬심은 그리 너그럽지 못했다. 아차 싶은 순간, 이미 그는 딱딱하게 굳힌 얼굴로 초면에도 무례할 정색을 선보이고선 믿을 수 없다는 양 되물었다.



 “…아저씨, 설마 유중혁 모르세요?”

 “……유중혁?”



 또 한 번 되돌아오는 물음 끝으로 김독자는 뚝하고 퓨즈 끊기는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나마 아주 좁쌀만큼 남아있던 정상사고 회로가 서둘러 목소리를 잠기게 해준 덕분에 공원에 이어 기획사까지 쫓아와 고성방가를 저지르는 김독자 28년 인생 초유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울컥 튀어나가려던 것이 목 안으로 잠겨버린 탓에 마른기침이 터진 것까지는 참기가 힘든지라 한 손으로 들기는 퍽 힘든 꽃다발을 멀찍이 자신에게서 떨어트려 잡고는 눈가가 젖을 만큼 콜록콜록 한참을 기침만 쏟아내고서야 김독자는 겨우 다시 제 앞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귀찮음과 피곤함이 세월처럼 덕지덕지 엉겨 붙은 중년의 경비원이 아니었다.



 “……공원. 맞지?”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쓰고도 훤칠하고 다부진 체격으로 잘생김을 미친 듯이 내뿜는 유중혁이 서 있었다. 그것도 기침하느라 떨어트려 놓았던 꽃다발을 내민 정방향에 말이다. 정말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꽃다발에 꽂아두었던 카드까지 유중혁을 향해 있어 수치심을 배로 증가시켰다. 그런 속도 모르고 유중혁은 가만히 그 카드만 쏙 집어 내용물을 펼쳐보았다.


 [태어나줘서 감사합니다.]


 카드 한가운데에 떡하니 적혀있을 고작 단 한 마디를 유중혁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눈으로 필체를 훑었다.



 “아니, 그게, 저……는 그냥…. 근처 지나가던 길에…… 그러니까 팬은 맞는데 지나가다가 생일인 게, 아니 유중혁 씨, 유중혁 님 생일인 건 원래 알았는데요.”

 “…….”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유중혁의 시선은 카드의 필체를 그대로 덧그리기라도 하는 양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카드 뒤편으로 화사하게 핀 꽃다발로 향했다. 이어서 여전히 빠른 속도로 흔들리는 김독자의 동공 지진에 닿았다.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는 김독자 본인에게만 또렷했다. 정말이지 잘생겼다는 말을 그대로 구현한 얼굴이었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마주친 시선조차 선망으로 매료되고 마는 무언가가 유중혁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마치 맹수 앞에 굳어버린 사냥감처럼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은 물론이오, 한번 크게 들이쉰 숨소리 이후로는 신경이 쓰여 호흡 자체가 힘들어졌다. 자연히 힘을 잃고 무게중심까지 잃어버린 김독자의 신체는 뉴턴의 사과처럼 속절없이 땅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려던 차였다. 


 고성방가에 이어 이번엔 무릎 꿇고 꽃다발인가, 기어코 추가된 명예의 이불킥 전당에 감격한 김독자는 이윽고 무릎에 닥쳐올 재앙에 눈부터 질끈 감았으나 현실은 한층 더 상승한 민망함을 김독자에게 선물했다.



 “언제까지 눈 감고 있을 거지?”



 평소 욕을 즐겨 하지 않는 김독자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상황에 이끌려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흘러나올 뻔했다.



 “……미쳤네. 얼굴이 진짜 미쳤어.”



 대신 더 솔직한 진심이 신이 나서 대타로 튀어나왔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그리고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의 유중혁이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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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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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미식협 [해7a] 에서 나올 '오! 나의 배우님!' 1차 샘플입니다.

전연령 떡제본으로 발행할 예정이며,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를 이어붙이듯 넘버링하여 내용이 진행되다보니 한번 더 추가샘플을 공개할 생각입니다.

별도의 선입금예약은 없으며 수량조사에 최대한 맞춰 현장판매와 행사 이후 통신판매로만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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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대표이사실]


 정희원은 묵묵히 그 명패를 노려보았다. 이미 한 차례 역할을 끝낸 손은 문 앞의 허공에 어중간하게 멈춰있었으나 또 두드릴 기미라곤 없었다. 대신 그녀는 문 안쪽에서 미미하게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차분히 양 눈썹을 일그러트릴 따름이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제 덩치 탓에 한참은 더 작아 보이는 서류철을 든 이현성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결국, 정희원이 뒤쪽으로 손을 탁 내려치며 조용히 하라는 의미를 직접 전달해서야 거대한 부산스러움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문 안쪽의 소음은 도리어 한층 더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분명했다.



 “이사님!”



 그리고 정희원의 인내심도 폭발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노크하기보다 냅다 문을 열어버리는 쪽을 택한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이라곤 한층 더 선명하고 소란스럽게 내리치다시피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리뿐이었다. 아주 그냥 부숴버릴 듯이 두드리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 정상 업무는 이대로 끝이 분명했다. 뻔한 결말을 눈앞에 두고도 정희원은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냈다. 그렇게 다가간 책상에는 키보드 소리뿐만 아니라 험악하게 중얼거리는 혼잣말 소리까지 남김없이 들려왔다.



 “이보세요, 김독자 씨!”

 “희, 희원 씨!”



 기어코 막 나가는 정희원을 차마 붙들지는 못하고 이현성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난데 아닌 아비규환이 코앞에서 펼쳐졌는데도 여전히 방의 주인은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목을 앞으로 빼고 계속해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었다. 책상 옆으로 살짝 치워둔 그의 스마트폰에서는 연신 알람이 울려대며 이 상황에 더욱 혼란스러운 서라운드를 가미해주었다. 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듯이 회사 최고 결정권자께서는 현재,



 “중혁이가 개복치면 니들은 심해오징어다. 이것들이 진짜 뚫린 댓글 창이라고 막말하네. 미친, 진짜 어이없어. 중혁이를 개복치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거든? 그래, 나 얼빠다. 어쩔 건데?”



 한창 배우 덕질중이시기 때문이다.



 “야! 김독자!”



 기어코 뚜껑이 열린 그녀와 김독자의 사이를 제 몸으로 틀어막은 이현성은 그제야 퀭하게 눈그늘이 내려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것에 약간 안도했다. 오전 회의 당시에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사람이 그새 이렇게까지 퀭하게 피곤이 내려앉을 수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지금 당장은 그가 화면에서 눈을 뗐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죄송한데, 결재는 내일 가져오세요.”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치고 들어온 대답은 이리도 원망스러웠다. 그런 그의 심경을 골백번 이해한다는 양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날카롭게 김독자를 겨누었다.



 “회사에서 일 안 해요? 일?”

 “……이번엔 문 안 잠갔잖아요.”

 “못 잠근 거겠죠. 내가 부숴놔서.”

 “…….”



 또로록. 이현성은 훈련 중에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눈알 굴러가는 소리 난다는 말뜻을 이제야 똑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옆으로 슬그머니 회피하던 김독자의 시선은 기어코 막 새 알람이 뜨던 스마트폰 액정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컴퓨터 화면으로 또 힐긋, 그리고 다시금 이현성에게 닿았다.



 “현성 씨.”

 “네.”

 “보안팀장님.”

 “네, 김 대표님.”



 부르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이현성의 눈은 갈팡질팡 김독자와 정희원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발 빠르게 붙든 이는 다름 아닌 사태의 원흉, 김독자 본인이었다.



 “정희원 이사님 좀 사무실까지 모셔다드리세요.”



 눈 밑으로 어둑한 그늘이 지고서 활짝 만개한 미소는 매우 수상쩍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잠시 굳어버렸고, 정희원 또한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가 바락 뒤늦은 성을 내었다.



 “대표라는 놈이 일은 안 하고 문 잠그고 수상한 짓거리나 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요?!”

 “수상한 짓거리?! 우리 중혁이 팬질하는게 뭐 어때서!”

 “그래서 지금 업무 시간 중에 키배뜨는 게 자랑이냐!”



 급기야 다시금 튀어나온 짜증을 어떻게든 몸뚱이로 틀어막은 이현성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녀를 밀어냈다. 차마 손으로 붙잡지는 못해 어정쩡히 손목과 팔꿈치로 툭, 툭, 세지 않은 힘을 들이는 모양새가 도리어 안쓰러울 지경이었으나 정희원도 김독자도 먼저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이현성이 선택하는 1순위는 결국 한 사람이었다.



 “……희원 씨, 사무실까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내 발로 나갈 거예요! 저 인간 저거! 누가 보면 아주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김독자는 대답조차 없이 다시금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원흉의 시작은 그러니까 정확히 1년 전에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



 어렵사리 세운 회사가 겨우 안정궤도에 진입했을 즈음이었다. 대표자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근 2년 동안 휴일다운 휴일을 누려보지 못했기에 김독자는 이 꿀 같은 휴가를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온 즉시 샤워부터 끝내고는 식사도 아닌 잠부터 보충하기 위해 비척비척 침대로 향했다. 몸을 제대로 뉠 겨를조차 없이 베개부터 가져다 얼굴을 푹 파묻어버린 김독자는 그대로 느릿한 호흡을 반복했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뻗어버린지라 축축한 머리카락이 목덜미와 얼굴에 붙어 꽤나 성가셨지만, 이미 한참 전에 감긴 눈꺼풀은 물론 온몸이 물먹은 솜마냥 무거워서 이대로 푹 꺼져 침대에 삼켜지는 우스운 상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안락한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하필 나오기 전에 커피 마셔서.”



 잘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김독자의 복병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습관이 되어버려 거의 물처럼 마시던 커피가 하필 이 타이밍에 실력발휘 할 줄은 꿈에도 모른 것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진탕 마셔대도 졸음만 한가득하였건만, 당장 자려고 누운 지금에야 또렷한 정신과 예민해진 감각이 열심히 일하는 통에 결국 그는 피로한 좀비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누워도 지옥, 일어나도 지옥이야. 아으…….”



 절로 흘러나오는 곡소리를 투덜거리며 김독자는 미적미적 침대 위에 똑바로 자리를 잡았다. 딱딱한 침대 헤드 사이에 베개를 두 개나 꾸역꾸역 욱여넣어 기대기 쉽게 하고서 그는 퍽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제목부터 지루한 영화라도 보고 있으면 물러갔던 수마도 다시금 득달같이 쫓아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 단순한 사고와 잘 맞아떨어진 우연은 김독자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오, 학교? 이 시리즈 되게 오래 하네.”



 문화생활로 영화도, 대외활동도 아닌 책을 선택하는 김독자였다. 즉 그의 집에 있는 TV는 잠을 달아내는 용도로 드문드문 사용했던 터라 켜자마자 올라온 채널에는 익숙한 타이틀의 미니시리즈가 방영 중이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채널을 더 돌려보거나 영화를 찾는 수고로운 일을 감행하는 대신 음량만 적당히 조절한 후 그대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1화부터 재방송이라는 친절한 상단 문구까지 확인한 김독자는 침대 꾸밈용 쿠션까지 끌어안고서 본격적인 관람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하고 뻔한 전개에 금방 잠이 들 거라 철썩같이 믿었던 그는 최종화를 코앞에 둔 15화까지 몰아쳐서 모두 시청하고 나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야 지극히 간단했다.



 “유중혁……? 쟤 신인이지? 아니 그것보다, 와…. 사람이 왜 저렇게 잘 생겼냐.”



 퇴근하자마자 식사까지 건너뛰며 잠을 택했으나 현실은 날밤을 새워 드라마를 시청한 거로도 모자라 배우 입덕의 문턱에 이미 한 발자국 들어간 실정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여기에서 끝이면 다행이련만 수마가 다시 돌아올 자리조차 주지 않고 그의 두뇌는 빠르게 새 명령어를 실행시켰다.


 충전기에 꽂아놨던 스마트폰을 다시 켜자마자 그의 두 손가락은 유중혁이라는 이름부터 바로 검색했다. 이윽고 드러난 짤막한 프로필을 빠르게 눈으로 훑은 김독자의 시선은 그 아래 역시 길지 않은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광고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아역으로 시작해 제대로 된 배역은 당장 김독자가 보았던 미니시리즈가 전부였다. 아쉬우면서도 뭔가 원석을 일찍 발견한 듯 묘한 뿌듯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러던 차에 눈에 띈 소위 ‘카페’는 김독자를 컴퓨터 앞으로 기어코 앉혀놓기에 이르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만지는 일이라곤 그저 업무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던 삭막한 그의 인터넷 창에 처음으로 사적인 즐겨찾기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회원 수가 얼마 되지 않은 카페에 가입하고 등업 신청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게임도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설치하다 지우기를 반복한 것이 무색하리만치 김독자는 모든 게시판의 글을 1페이지부터 하여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카페 회원들이 올린 소위 ‘썰’과 ‘직찍’은 고작 몇 시간 전에 재방송을 통해 처음 만난 유중혁을 직접 만난 것마냥 짜릿한 간접체험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본인이 실제 직접 경험한 일도 아니거니와 거의 맛보기 수준에 가까운 대리만족은 마른 목에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등업신청글을 제외한 모든 전체 글을 두 번씩 정독하다시피 훑은 김독자는 망설임 없이 새 창을 띄웠다.


 검색란 맨 왼쪽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가만히 노려보던 김독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한 그의 손은 빠르게 내용을 채워나갔고, 엔터를 누른 순간 창은 바뀌었다. 


 검색창 상단에는 굵은 글씨체로 [DSLR 클래스 강좌]가 떠 있었고, 김독자는 맨 위에 뜬 링크부터 차례대로 그 내용을 확인하면서 보다 더 효과적으로 팬질할 방법을 모색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말이다.




2.



 “완전 팬이에요!”



 저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김독자는 본인이 망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정신을 놓기 전, 그러니까 거의 석 달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놓치지 않고 수강했던 ‘DSLR 클래스’를 수료하고 신이 나서 새 렌즈를 지른 직후의 김독자는 드디어 만끽할 수 있게 된 토요일의 자유에 신난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대기업에 비하면 아직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신생 회사였다. 겨우 얻은 꿀 같은 이틀의 휴일 초입에서 유중혁에게 틀어 잡혀버린 김독자에게는 이게 정말 실현 가능한 일정이냐 싶을 정도의 빼곡한 업무와 일상이 뒤엉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아져 일주일 중 6일 근무 상태에서 생긴 유일한 휴일 하루를 김독자는 아쉬워하지도 않고 클래스 강좌를 들으러 먼 거리의 출사까지 행차하곤 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굴러가자 주변에서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냐며 당연한 궁금증을 보였다. 김독자는 그냥 쉬는 날 보았던 드라마에 잘생긴 배우가 나왔는데 나중에 우리 회사 모델로 쓰면 어떨까 싶어서 직접 사진을 배운다는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내놓았고―창업 파트너인 한수영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급기야 그의 일정과 업무를 묵묵히 보좌하던 유상아조차 사뭇 진지하게 병원에서 링거라도 맞아야 하지 않겠냐며 넌지시 걱정스런 소견을 보탰다.


 그리고 드디어 그 끝을 본 것이다.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카메라가 어느 정도 손에 익은 데다, 원하는 것을 웬만큼 잡아낼 줄도 알았다. 추가 수강은 필요 없다며 산뜻하게 안녕을 고한 김독자는 그 길로 전자상가부터 쫓아가 눈독 들이던 렌즈부터 질렀다. 멀리 있는 피사체를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끌어당겨서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는 물론 광각렌즈까지 기어코 새로 장만한 그의 앞에는 이제 개인의 취향에 맞는 즐거운 출사 길만이 펼쳐지리라 의심치 않던 그 순간, 김독자는 마주하고 말았다. 


 실물 유중혁을 말이다.



 “와, 잘 생겼다. 연예인인가?”

 “나 저 사람 TV에서 본 것 같아. 그……, 엄청 오래 하는 미니시리즈 있잖아. 그 뭐지? 학교에서 하는 거.”

 “그게 그냥 학교지, 뭐. 네가 말하니까 익숙한데?”

 “그치? 맞지? 이름이 뭐더라?”

 “……유중혁?”



 유중혁. 이름이 들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돌아본 김독자의 시선 끝에는 화면에 비친 유중혁이 아닌 순도 100%의 실물 유중혁이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뇌가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인지한 이후에는 그대로 블랙 아웃처럼 모든 기억이 끊기기까지 일순이었다. 그리고,



 “완전 팬이에요!”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망했다. 암, 시작도 전에 망했고말고.


 애초부터 입덕부정기를 가질 필요가 없었건만, 뭐가 아니라며 그렇게 버티고 버텼을까. 나중에 회사 모델로 쓰면 어떠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깔깔깔, 살다 살다 이런 대환장쇼는 처음 보겠다며 즐거워하던 한수영의 비웃음이 성가시게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거기다 대고 인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어 김독자는 닥치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이 빌어먹을 우연으로 실물을 영접한 지 고작 1분도 되지 않아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 팬이라며 대대적인 광고까지 펼쳐버린 김독자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뻔뻔하게 도망가기.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진작 유중혁에게 저당 잡혀버린 그의 팬심은 이성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한발 빠르게 제멋대로 움직여버렸다. 인사를 받는 쪽이 민망스러우리만치 정중하고 각 잡힌 영업사원마냥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은 물론이오 당최 뭘 잘 부탁한다는 건지 목적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인사까지 통틀어서 김독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매우 망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봤자 어쩌겠는가. 물은 엎질러졌으니, 김독자는 품에 안은 소중한 렌즈를 더욱이 꼭 끌어안으며 냅다 공원을 가로질러 제집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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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원래 회지로 내려던 내용입니다만 센티넬버스의 저작권을 알아버린 이상... 이 원고는 휴지조각입니다... 패앵!!!



카르나. 카르나. 카르나. 카르나. 카르나.

세뇌처럼 머릿속을 휘젓는 이름에 아르주나는 더욱 어찔해졌다. 더불어 속이 더부룩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아르주나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주나 님,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아르주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팔에 꽂혀 있던 무언가가 쑥 빠졌다. 그 감각은 썩 불쾌해서 아르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의식을 묻던 간호사가 성의 없는 사과를 건넸고, 바늘이 꽂혀 있었던 부분을 차가운 솜으로 힘주어 문질러주었다. 그것이 꽤나 아려서 아르주나는 결국 억지로 퍽퍽한 입술을 움직이고 목을 울렸다.


 “……난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를 하고서 괜찮다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간호사는 깔끔하게 아르주나에게서 손을 뗐다. 머리가 여전히 어지러웠으나 속이 거북한 것은 조금 괜찮아진 듯했다. 그래서 아르주나는 눈을 떴다.


 “깼나?”

 “…….”


착각이었다.

속이 더욱 거북해졌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한바탕 원맨쇼를 선보일 수 있을 만한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것이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짰다. 모든 일의 원흉이 스스로 제 앞에서 비킬 기회와 시간을 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르주나의 입에서 말이 되기도 전에 물거품처럼 녹아버렸다. 원흉이 먼저 입을 열어 부정의 대답부터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못 나간다.”


어째서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물음은 허망할 뿐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아르주나 저 스스로 대답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센티넬인 아르주나가 센티넬인 카르나에게 각인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당사자인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믿을 수 없었으나 현실이 이렇기에 아르주나는 꼼짝없이 기억을 되짚어볼 뿐이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르주나는 물론 그를 주시하던 카르나까지 더 괴로워졌다.


 “난 센티넬이다.”

 “안다.”

 “그런데 내가 왜 너 따위의….”

 “더 말하지 마라.”

 “…가이드가 되었지?”


자신에게도 묻는 양 뱉어버린 질문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카르나가 오만상을 찌푸렸으며, 그에 질세라 질문자 아르주나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로지 그 두 사람만 싫은 티가 역력했고, 간호사를 포함한 전문 의료진들은 각자 할 일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척 바쁘게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야 당연했다. 저 두 사람의 말다툼과 신경전에는 이미 신물이 난 데다 말린다고 들을 인물들이 아니셨으니 당연했다. 그 카르나와 아르주나였다. 이름만 떠올려도 골치가 아프다며 다들 모로 돌아 혀를 내둘렀다.



Posted by 연시온
,

@yeon_sion

트위터에서 풀었던 페이트 썰 정리합니다.


*




카르주나로 리맨물 보고싶다. 낙하산 싫다며 구태여 입사시험 보고 힘들게 들어왔는데 기어이 낙하산 소문이 꼬리에 붙은 기획팀장 아르주나와 현장에서부터 차근차근 자수성가타입으로 자기 입지를 굳혀 올라온 현장관리팀장 카르나가 큰 건 하나를 같이 하게 됐는데 첫회의부터 아다리가 안맞는거.

웃긴건 팀원들끼리는 사이가 좋고 의견교환과 이해도 빠른데 팀장들끼리만 뭔가 서로 주도권 잡으려고 스파크 쩔게 튀고... 저 두 사람은 초면 아니었냐 왤케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전생부터 웬수이고 내생에도 웬수일 것이다라고 모두 암묵적으로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둘이 입사 동기에다가

신입사원 오티때 개쩔게 잘 맞아서 좋은 라이벌 관계였는데 둘이 의기투합으로 술 마셨다가 모텔에서 함께 아침짹한 이후로 아니야난그럴리없어이게말이되냐 라는 회로체계로 모른척무시>니네 안친했냐?>무슨 개소리를!!>대화단절>사이악화>지금 이모양이꼴... 의 전개였으면.




*




파티시에 카르나와 쇼콜라티에 아르주나............ 하필 같은 호텔 디저트군단으로 만나 서로 견제 개쩔었으면...ㅇㅅㅇ




*




솔까말 내취향 카르주나는 센티넬버스 각인데... 아르주나는 저놈 면상도 보기 싫어 죽겠는데, 면상도 봐야하고 스킨십 하면서 가이딩 해줘야함. 안 해주면 저놈이 죽어버려서 잡혀감. 솔직히 죽어도 상관없는데 본인이 힘들어져서 더 싫음. 짜증나 디지겠음. 이런거....

그래서 아르주나 입장에서는 저자식이 가이딩 못받고 뒤지느냐, 내가 홧병으로 뒤지느냐 쾅쾅 울면 뒤에서 쿤티가 아이고 아들아 참아라 하는거지

더 웃긴건 카르나도 딱 저상태인거. 하고 많은 가이드 중에 왜 하필 쟤냐. 아이고 돌겠다 약이나 줘라 참을란다. 하면서 꾸역꾸역 버티다가 몸 몇번 크게 아작나고 깨어났더니 아르주나가 뭐씹은 표정으로 치료캡슐 안에서 카르나 끌어안고 있는거. 눈감으라고. 눈까지 마주보면 토할거같다고.

카르나 약간 모든 표현의 결여가 센티넬 부작용같은거였으면 좋겠다. 말이 꼭 한 마디 모자란 것도, 피부가 창백하게 질린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리고 얼굴과 가슴께를 제외한 전신이 까맣게 그슬린 것처럼 검은 문양이 퍼져있다는 설정을 얹어서ㅇㅇ



*



엘리트 가도만을 걸어온 아르주나는 이미 형들도 많고 자기는 후계자의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딱히 별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어머니 쿤티가 노환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남은 시간을 걱정없이 차분하게 정리해야할 그녀는 오히려 수심이 깊었으면. 그리고 어느날 조용히 아들들을

불러모아 어릴 적 자신의 실수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미 그들의 아버지는 그 실수를 용서했지만 차마 거두어 키울 수는 없어 잊으려 노력했던 아이가 있었다며. 어머니의 수심을 덜어드리려 그 아이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는데, 그는 다름아닌 자수성가로 이미 대기업의 대표가 된 카르나.

그것도 심지어 라이벌 그룹의 총수인지라 마냥 좋아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았으면. 카르나는 이미 어머니 쿤티를 알았고 그녀와 이야기 한 번 라기 위해 어떻게든 그 자리에 올랐으나 막상 그녀를 앞에 두자니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아 바라보기만 하다 인사도 대꾸도 없이 몸을 돌리고.

아르주나는 그를 따라나가 강하게 꾸짖지만 카르나는 묵묵부답으로 역시 가만히 바라만 볼 뿐.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듬 깊이 빨아들이고서야, 역시 여길 인수하는게 좋겠군. 한마디 툭 던지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나가버렸으면. 멍해있던 아르주나가 무슨 뜻이냐 쫓아나가 캐묻자

그 말 그대로의 뜻이지 무어가 더 있겠냐며, 어머니도 내가 모셔야하고 무엇보다 나의 자리에 제대로 돌아오려면 당연히 인수해야하지 않겠나. 아르주나는 점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데 카르나는 피식 웃으면서 짧아진 담배 꽁초를 비벼끄고 거기다... 서열로 따져도 내가 장남아닌가?

떠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아르주나가 처음으로 후계자 자리에 자신의 권한를 주장했으면. 얼마 안 있어 카르나는 정말로 빈방에 제멋대로 들어와 살고 차마 어머니 속이 탈까 형제들은 눈치만 보는데, 아르주나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재능과 실적을 빛냈으면. 그렇게 기묘한 동거의 시작.




*



아직도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렇게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아르주나의 독백. 선천적인 불치병을 앓고 매번 바뀌는 시한부인생의 카르나와 단순히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찾아왔던 대학생 아르주나. 어느새 아르주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는데도 그의 곁을 지키는 일기.

결국 너는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역시 아직도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로 끝나는 일기. 카르나 또한 아르주나를 사랑했고 아르주나는 계속 카르나를 사랑하는 그런 일기.

아 물론 카르주나ㅇㅇ... 카르나가 당장 숨이 넘어가고, 장례식 때까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아르주나가 그의 공간에 혼자 들어선 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며 숨 한 번 삼키기도 힘들만큼 숨죽여 오열했으면.




*




카르주나로 처음엔 불면증으로 상담치료를 시작한 공감능력 결여의 카르나가 유일하게 상담의 아르주나에게만 불에 데는 듯한 감정을 공감했으면 좋겠다.

잠이 안 와서요. 로 시작한 상담이 어느새 당신을 보면 욕구가 생깁니다. 이게 뭘까요. 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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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yeon_sion

트위터에서 풀었던 마비노기 썰 정리했습니다.


*




난 1:1도 좋지만 1:다수도 좋아해서, 밀레를 두고 알터, 톨비, 카즈가 기싸움 하는게 너무좋다. 와중에 밀레는 가운데에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유 그래봤자 내가 제일 세서 니들 다 이겨요 귀여운 것들 이러고 있고.

그거랑은 다른 의미라고 셋이서 지들끼리 왁왁거리는데 그냥 그 모습이 마냥 귀엽고 하찮은 nnn살 밀레... 섹슈얼적인 의미를 포함해서 좋아하는거라고 방방 뛰던 말던 밀레는 아니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연애도 안해봤을거같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싸해지는 분위기를 초래하고

언제나 올망올망 귀여운 대형견 알터도 갑자기 알파력 뿜으면서 그래서 몇 번인데요? 밀레시안님? 하면서 후드 벗고, 톨비쉬는 싱긋 웃으면서 역시 아이던 이 개(비속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카즈윈은 헤에... 그 중에서 아직 살아있는 사람 있어? 하면서 나른하게 마스크 올리고.

아니 니들끼리 마저 싸우세요. 왜 갑자기 나를 끌고 가? 눈치없이 버럭하는데 셋이서 서로 마주보면서 눈짓을 교환하더니 그대로 밀레 제압해서 들쳐업고 청문회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 뒤에서 특별조 애들은 조장님 어케 사달날까 발 동동 구르고

알터밀레가 알터의 맹목적인 동경으로 시작한다면, 톨비밀레는 어디까지나 기사단의 번영을 위해 밀레를 희생시키려던 톨비쉬의 오만함이 연민과 죄책감으로 변형된 쪽. 카즈밀레는 첫만남이 신뢰를 둔 결투라는 데에서 한번 신뢰하기 시작한 카즈윈의 조건없는 독주.

그래서 알터는 처음에 이게 제 첫사랑인지도 모르고 무조건적으로 밀레시안을 예찬했으면 좋겠다. 분명 밀레시안님은 대단해요! 멋있어요! 짱 세요! 와 나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 이런 부류의 재능과 능력을 예찬한 것이었다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바뀌는거지

밀레시안님은 정말 강인하신 분이에요! 진실된 분이에요!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그리고 어느새인가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에요! 로 바뀌어서 알터 본인만 빼고 다 알았으면... 그거... 호감 아니야... 그거 연애감정이야 멍청아...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난 밀레가 알터한테 나 보고 싶었어?? 농담 건넸는데 알터가 웃지도 않고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정말 보고 싶었어요... 자각도 못한 채 대답하고서야  자기 마음 깨달았으면. 밀레는 그런 알터가 귀엽다고 아이고 내 강아지 끌어안고 알터는 더 말도 못하고 꼬옥 마주 안고.

톨비쉬는 이미 알터 모습 보고 저런 쯧쯧 혀를 차면서 웃고 말았는데, 어느날부터 밀레의 모든 것을 보고받는 제 모습에서 사사로운 웃음을 발견함. 환생하자마자 맨손으로 곰부터 때려잡았다, 알바 하다가 휴즈터져서 신나게 감자 주으러 다녔다, 염앰 남아서 로브를 번쩍번쩍하게 염색시켰다 등등

어느새 밀레의 일상을 자기 혼자 공유하며 즐거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 자중해야지. 의식적으로 조심했는데, 게이트 앞에서 카즈윈이 치명타를 막아준 덕분에 살아남은 자신과 너무나도 의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서서 전투하는 밀레만 남은 상황에서 결국 본심이 튀어나오는거.

그리고 모두가 이자식 이거 노렸다... 싶은 그 대사를 하게 되는거. 결국 당신만 혼자 남았군요. 언제나 이런 식이었이었습니까. 언제나 이렇게 혼자 전장에 남아있었던겁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번엔 제가 끝까지 당신 곁에 남아있겠습니다. 밀레가 살짝 돌아보며 씩 웃고 화답하는걸 보고

그때부턴 정말 한 점 부끄럼 없이 순수하게 밀레를 사랑하는 톨빗이었으면. 양 어깨에 기사단을 얹은 막중한 책임감을 두고도 양 팔에는 밀레를 꽉 안아 제 전신으로 지키는 느낌의 톨비쉬... 밀레는 그저 이 철면피가 이번엔 또 뭘 꾸미려고 따위로 경계하지만 은연중 톨비쉬에게 자주 기댔으면.

카즈윈은 밀레에게 제법 무례했던 첫만남 결투 이후로 나름 밀레를 믿기로 결정했으니 끝까지 믿어보자는 식이었으면. 물론 게임 내에서도 밀레하고만 계속 정보교류했으니까... 게이트 사건 이후에는 밀레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어서 피네보다 더 가까운 교류가 많아지고

알터가 앗 밀레시안님 뺏겼다...ㅇㅅㅠ할 정도로 카즈가 밀레한테 꼭 붙어 다녔으면 좋겠다. 물론 밀레도 기사단 인물 내에서 신뢰도 1순위는 카즈윈이었으면. 만사에 귀찮아하는 카즈윈이지만 상대가 밀레일 경우에는 꼭 붙어다니고, 경청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알터와 톨빗이 밀레에게 서서히 마음을 허락하는 모습을 가장 먼저 눈치채면서 밀레에게 슬슬 집착하기 시작하는거... 특히 톨비를 가장 마음에 안들어하는거지. 알터랑 내가 제일 처음부터 알았어. 하면서 잔뜩 날세우고... 밀레는 내가 더 좋대. 밀레 꼭 끌어안아 감추면서 애같은 투정도 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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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쉬를 보며 타르라크를 떠올리는 밀레와 그런 밀레를 제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보는 톨비쉬 존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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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번=브류나크라는 설정으로, 이계신을 멸하기 위해 제 몸 자체를 브류나크에 봉인한 밀레. 그리고 서포트는 알반이 맡고, 더없이 화려하고 강철의 방패를 견고하게 세우는 톨비쉬와 언제든 만전의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틈을 만드는 카즈윈, 유일하게 브류나크를 쥘 수 있는 알터가 보고싶다.

언제나 제 앞을 맡겼던 톨비쉬와, 등을 맡겼던 카즈윈이지만, 정작 밀레가 담긴 브류나크는 알터만이 쥘 수 있었으면. 그리고 밀레를 완전히 잃는다는 기실을 곱씹어가며 증오서린 쪽빛 눈으로 이계신을 노려보는 알터. 그 어떤 때보다도 가볍고 날렵하게 스파크가 튀는 브류나크를 휘둘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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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쉬. 어디서든 이름을 부르면 밀레가 쉬는 여관 혹은 기사단 밀레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톨비. 부르셨잖습니까. 태연하게 웃으면서 밀레를 꼭 안아주는 톨비밀레.

카즈윈. 어디서든 이름을 부르면 밀레의 앞, 뒤, 혹은 옆에서 조용히 나타나 불렀어? 하고 나타나 머리를 만져주는 카즈밀레.

알터. 어디서든 이름을 부르면 부엉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와 [보고싶어요][다치지마세요][힘내세요]가 적힌 쪽지를 하나씩 배달해주는 알터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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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윈 저 설정 너무 좋아... 그런 의미로 소울스트림에서 환생조차 막혀버린 밀레가 의식을 잃고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밀레의 의식에 들어가 밀레를 찾는 카즈윈으로 카즈밀레.

시작은 똑같이 해서 카즈윈을 앞세워 밀레의 의식안에 들어가 밀레를 찾는 카즈윈, 톨비쉬, 알터도 좋다(글러먹음) 그리고 이미 밀레에 대한 정보들로 그 혹은 그녀를 매우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밀레가 새로운 각성을 이어갈 때마다 느꼈던 감정의 범람에서 스스로에게 분노가 이는 셋.

내가, 내가 더 빨리 당신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적어도 이 빌어먹을 화수분이 조금은 제 기능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욕심같은거. 언제나 이용당하기만 하면서 신조차 되지 않았던 상냥함에 세명 다 밀레를 그냥 이대로 편히 잠들게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까지 가게되는거.

이대로 당신이 죽어서 소울 스트림에 이르러 또 신의 뜻대로 환생하고 또 이용당할 바에야, 그냥 우리가 믿는 신의 대행자, 약간 현실의 예수같은 심볼이 되어 당신에게 행복한 꿈만 주고 지켜주는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밀레의 의식이 그들을 먼저 찾고 깨어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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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제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하고 짓씹듯이 나지막하게 절규하는 톨비쉬 보고싶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요? 그냥 제가 미친걸까요? 하고 웃는양 우는 알터 보고싶다.

알잖아. 왜 피해. 똑바로 이야기해줄까. 널 사랑해. 하고 어둠 속에서 청회색 눈을 빛내는 카즈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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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뜬금없이 고백해놓고, 다음날 밀레의 앞에 방패를 들고 선 톨비쉬 보고싶다. 이젠 하다하다 그런 걸로 사기를 치냐 이 협잡꾼하면서 배신감에 이를 드륵드륵 가는 밀레에게 전투 시작 전에 형식상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오는 톨비. 제 방패를 땅에 박아놓고 다가온 톨비쉬가 돌연,

역시 미리 고백할 걸 그랬습니다.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씀드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제 할말만 줄줄 잇더니 그대로 자신이 끌고왔던 기사단 대군을 향해 저지먼트를 날렸으면 좋겠다. 무슨상황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밀레의 손에 여신의 날개를 쥐어주고 강제로 부러트리면서,

오늘은 제가 죽는 날이거든요. 하고 웃는 톨비쉬의 미소가 마지막 모습. 멍하니 이리아 변방에 도착하게 된 밀레의 손에는 톨비쉬의 마지막 온기가 부서진 여신의 날개랑 함께 파스스 무너져 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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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시안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저 진짜 완전 너무 엄청 밀레시안님이 보고 싶었어요. 잘 계셨나요? 저 없이도..? 헤헤, 농담이에요. 아프거나 다치신 곳은 없죠? 밀레시안님이니까 당연히 아프거나 다쳐도 괜찮다고 하실테지만... 전 마음이 아프다구요.. 하면서 강아지마냥 찡찡대던 알터가

밀레시안 등 뒤에서 사도 등장하는 순간 정색하면서 바로 상체 굽혀 랜스차지하고, 제치듯이 점프하더니 밀레시안을 톨비쉬에게 확 떠밀었으면 좋겠다. 개이득한 톨비쉬지만 당연히 여유로운 미소로 안면 몰수하면서 방패로 밀레시안 감싸고 실드 오브 트러스트 올림... 그리도 당연한 얘기지만

톨비쉬 바로 등 뒤에는 카즈윈이 엄호 사격하고 있음... 슬쩍 톨비쉬 어깨 너머로 밀레시안 확인하고 뒤쪽 몬스터 섬멸한 다음에 알터에게 가세... 하는데, 결국 셋다 발리고 밀레시안이 사도 다 죽이겠지... 아 배고프다 우리 이제 뭐 먹을래요?ㅇㅅㅇ? 하고 뻗은 기사단 다 일으켜주면서..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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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일하다가 문득 물어보는 톨비쉬 보고싶다. 밀레가 아오 바빠 뒤지겠네 이거랑이거랑 사인해주고 이건 검토해주고 하다가 들고 있던 문서를 와르르르. 뭐라는거야 이인간이!! 얼굴 새빨개진 밀레와 싱글싱글 웃는 톨비쉬와 못본척 지나다니는 기사단원들

카즈윈은 잠복임무 수행중에서 숨소리도 죽이고 타깃을 관찰하다가 밀레시안. 소곤소곤 부름. 밀레는 쳐다도 안보고 초집중모드로 왜요. 대꾸만 하는데, 사랑한다고. 해서 밀레 집중 와장창한 얼굴로 돌아보는데 미간찡그리고 뽀뽀하는 카즈윈. 뭐하는거에요?!/네가 먼저 귀여운 얼굴했잖아 임무실패.

알터는 게이트 뒤편에서 수련하고 밀레는 게이트 건물 안에서 몰래 그거 구경하고 있는데 돌연 알터가 밀레를 용케 돌아보더니 활짝, 밀레시안님!!!! 사랑합니다!!!! 쩌렁쩌렁 고백해서 밀레는 푸쉬쉬. 그냥 또 말씀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2차 쩌렁쩌렁에 정신혼미해진 밀레와 혼내러 쫓아오는 아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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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밀레도 좋지만 여밀레가 더 취향이어서... 물론 내 캐가 내취향대로 아주매우 예쁜 것도 사실이지만ㅇㅅㅇㅎ 그런 의미로 대자연 시즌만 오면 남자로 환생하는 여밀레 보고싶다... 피네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인데 아벨린만 동요하면서 묘한 철벽치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톨비쉬는 이런, 이번에는 아리따운(매우강조) 남성분의 모습이군요. 하하, 웃으면서 평소처럼 대해주지만 확실히 뭔가 삐친듯이 자주 하던 어깨동무나 팔짱이나 허그 등 가벼운 스킨십을 일절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임무를 빡세게 돌려버림... 밀레는 밀레둥절하면서 보노보노땀달고 임무클리어.

카즈윈은 처음에만 눈에 띄게 동공지진>인상찌푸림>뒷걸음질>그 길로 절찬 임무의 회오리에 스스로 걸어들어가 여밀레로 돌아올 때까지 귀환하지 않았음. 그러나 남밀레여도 매일 아침 창가에 발자국이나 밀레가 좋아하는 꽃은 여전히 놓여있었으면. 그리고 언젠가 남밀레든 여밀레든 똑같이 대하는거.

알터 역시 처음에는 동요했는데, 한결같이 밀레를 똑같이 대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렇다고 톨비쉬가 속좁은 놈은 아니고... 나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세 사람 다 별 신경 안쓰게 되는거. 그러다 어느날 알게되는거지. 그게 대자연때문에 남밀레로 일부러 환생했다는 사실을...

어느날 신나게 기르가쉬 때려잡고 으아 오늘도 잘 팼다^^ 하고 뒤돌았는데 표정이 완전히 굳는거... 싸하게 돌변하는 안색과 요동치는 살기에 밀레시안? 하고 조심스럽게 불러보는데 아 이런 (비속어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날자 잘못계산했다.... 하더니 여신 날개 부러트리고 사라져버림

기사단의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 겨우 밀레시안을 찾긴 했는데, 밀레시안이 미리 선수쳐서 부엉이보내는거... 아벨린 혹은 피네랑만 얘기하고 싶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싶어서 무작정 쫓아갔는데 알고보니까 대자연의 격통과 식탐과 짜증의 소용돌이에서 깨어난 밀레시안인거지.

댁들은 왜 왔어요? 어? 댁들도 여자야? 여자냐고 생ㄹ읍읍읍 하면서 아벨린과 피네가 조용히 방으로 끌고 들어가 초콜릿케이크, 진통제 먹이고 푹 재우고 남자들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당부했으면ㅋㅋㅋㅋ

약간 감금되다시피 대자연을 치르고 상쾌하게 귀환한 밀레의 방에는 밀레가 좋아하는 꽃이 한가득 침대를 장식하고 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포근 사르르 녹는 커다란 토끼인형이 있고, 밀레가 그렇게나 마셔보고 싶었던 와인이 리본장식과 함께 있는거. 남조장들 부르면서 뛰어나가는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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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하고 빠른 솜씨로 귤을 까서 제공하는 톨비쉬와 게임패드 하나씩 잡고 같이 신나게 두드려주는 카즈윈과 이제 저녁드시라며 어마어마한 전골을 차려오는 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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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빨리 당신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톨비쉬와 내가 더 빨리 당신이 가진 짐을 덜어드릴 수 있었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하는 알터와 내가 더 빨리 널 만났더라면, 하고 분해하는 카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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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때문에 몸이 드러나야하는 특수 의상을 입어야하는 밀레가 잘 꼼쳐놨던 승부속옷을 꺼냈으면 좋겠다. 입기 전에 조물조물 잘 손빨래해서 방에 따로 널어놨는데,(이하 각 기사단 반응 3가지)

예의+습관상 노크 세번 하고 바로 들어온 톨비쉬가 밀레시안씨, 이번 보고서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하고 보고서부터 내밀고 짚어주는거. 미처 감추지 못한 밀레시안도 정신 놓고 짚어주는거 설명하고 추가 내용 적고 있는데 그제야 승부속옷을 발견한 톨비쉬.

호오. 흥미로운 눈으로 속옷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뻗어서 아직 젖은 속옷을 꼼꼼히 훑어보고, 그제야 고개를 든 밀레시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굳어서 바라보니까ㅋㅋㅋ그런 밀레시안이랑 눈 마주치면서 호오. 하고 또 짙게 웃는 톨비쉬. 이런 취향일줄은. 공연히 한마디 더했다가 당장 나가라고 쫓겨남.

노크도 없이 들어온 카즈윈은 기척도 없어서 속옷을 말리고 있던 밀레 뒤에 스윽 섰으면. 미간을 찡그린 채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게 속옷이 맞나 잠시 생각하다가 혹여나 밀레가 도망가거나 스매시로 때릴까봐 일단 끌어안은채로 고개를 쭉 빼고 속옷을 이리저리 뜯어보는거.

미쳤나봐 언제왔어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시끄러워. 작게 중얼거리기도 귀찮아서 시. 한음절하고 여전히 속옷을 살펴보다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갸웃, 저거 가려지긴 하는거야? 매우 심기불편한 소리에 원래 그런 용도의 속옷이라는 말에 그럴거면 아예 입지 말라고 한소리 했다가 역시 쫓겨남.

알터는 정중한 노크 후에 밀레가 대답해줄때까지 얌전. 후다닥 대충 수건으로 덮어둔 밀레가 문을 열어주자 밀레시안님! 임무 준비로 바쁘신데 제가 괜히 왔나요? 기쁜듯 걱정어린 질문을 건네는데 밀레가 괜찮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해서 알터가 타온 코코아 마시면서 잠시 농땡이.

그러다 알터가 문득 웃으면서 이번 임무 대충 들었는데 아무래도 걱정돼서 저도 같이 간다고 했어요하면서 해맑은 얼굴에 어? 우리 햇살같은 알터랑은 영 안어울리는... 까지 얘기하던 밀레의 앞에 알터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수건으로 덮었던 승부 속옷을 들어보이면서 그러니까 이런건 입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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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비할 때마다 하는 행동들이 고스란히 톨비쉬의 눈과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많이 웃김.... 외형변화없이 환생을 하시더니 갑자기 벌목캠프의 너구리를 멸종시킬 듯이 섬멸하셨습니다. 혹시 변종 너구리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코르 마을을 뒤엎어 놓으셨습니다.

몬스터도 없는데 반신화를 하시더니 곳곳에 유물들을 솟아나게 하시고 하나하나 감정하시며 코르마을의 유적감별사와 말싸움을 하셨습니다. 밀레시안들은 대체 무엇이 목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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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모두 밀레의 영원한 죽음이 가장 두려운 악몽인데, 알터는 더이상 밀레를 볼 수 없다는 것/톨비쉬는 더이상 밀레를 지킬 수 없다는 것/카즈윈은 밀레가 더이상 괴로움이 없어 편안한 잠에 들었다는 것이 각자의 두려운 이유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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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꾸는 밀레시안으로 알터밀레+카즈밀레+톨비밀레 보고싶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밀레에게 PSTD가 나타나는건 매우 당연하건만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면. 그리고 밀레가 특별조를 맡아 공식적으로 기사단에 머물 자리가 생기면서부터 이야기 시작.

그날밤 전설로만 들었던 글라스 기브넨이 우는 소리라고 해도 믿을만큼 비명과 고함과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에 기사단 전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밀레는 자고 일어나니 쑥대밭이 되어있는 제 방에 영 민망한 미소만 드리우며 경위서를 자진납세.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역시 전 여관에서 따로 머물게요. 라는 말에 보고서를 읽던 톨비쉬도 눈 아래 다크서클을 꾹꾹 문지르다 고개를 젓고.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력이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그러나 밀레의 악몽이 만들어낸 잠꼬대(라고 부를 수 없는 몽유병)는 나아질 차도가 보이지 않고 결국 톨비쉬가 직접 나서서 밀레와 함께 잠들기로 함. 어이없는 동침의 시작에 밀레가 한사코 거절하며 물러나기를 택하지만 톨비쉬는 꿈쩍도 하지 않고 결국 같이 눕긴 하는데 뒤척일 뿐 잠들지 못하고.

영 불편하시면 다른 방법을 취해볼까요? 자기가 불편함의 근원이면서 뻔뻔하게 비킬 생각도 하지 않고 물어보는 톨비쉬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밀레가 그래 다른 방안이나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밀레를 꼬옥.

놀라서 경악 메들리를 추는 밀레를 아랑곳하지 않고 꼭 안아 차분히 등을 토닥여주며 톨비쉬가 콧노래도 아닌 흥얼거림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달래주고. 경악과 당황으로 물들던 밀레도 풋 웃음을 터트리다가 기운이 빠져 곧 잠이 들고.

아주 조심스럽게 안는다는 표현이 무색할만큼 닿다시피 톨비의 등허리를 살짝 당긴 밀레의 손에도 힘이 빠져, 그날밤은 처음으로 별다른 소동없이 끙끙거리는 작은 소음만으로 밀레의 몽유병은 종결. 다음날부터 공식적인 대안도 톨비쉬와의 동침으로 결정되고.

그러나 톨비쉬가 계속 잠자리를 함께 지켜줄 수는 없는 법. 유난히 서류일도 많고 투입되는 일도 많은 엘베드인데다가 심지어 톨비쉬는 그 엘베드의 조장. 톨비쉬가 없는 밤에는 어김없이 천지를 뒤흔드는 난리통에 모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카즈윈이 소리없이 밀레의 방 창가에 내려앉았으면.

빛을 잃고 완전히 풀려버린 눈. 그리고 그 눈가에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 타르라크? 하고 카즈윈을 돌아보았다가 이번에는 루에리? 아니야. 아이던? 누구지? 누구였더라...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두서없는 울음을 토로하는 밀레를 지그시 바라보던 카즈윈이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가고.

비명에 가깝게 다가오지말라는 단말마와 동시에 반신화까지 시전하는 밀레를 두고 카즈윈은 제 갑옷을 훌훌 벗어버리고서 자 봐. 나 무장 해제 상태라서 네가 툭 건들기만 해도 죽을거야. 그래도 괜찮아? 언제나 의욕없고 심드렁한 헤루인의 조장 모습 그대로 평이한 어조.

그 말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채 카즈윈이 한걸음 다가오면 똑같이 한걸음 물러나는 밀레. 밀레시안, 하고 이름을 부르자 움찔 반응하는 모습을 두고 이게 과연 몽유병 수준이 맞나 싶어 착잡함에 쓴입맛을 다시던 카즈윈이 재빠르게 그녀를 끌어안고,

개방된 여신의 힘이 반사적으로 수천의 까마귀를 부르려하지만, 귓가에 쉬이. 괜찮아. 괜찮아. 기다려줄테니까 내가 누군지 떠올려봐. 여기 있어. 기다리고 있어. 생각해봐. 하고 답지않게 어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감기는 눈을 끝으로 카즈윈, 정답을 말하는 꿈결에 대고 정답. 하면서 사건 종결.

수만의 걱정이 내려앉은 얼굴로 내용을 들은 톨비쉬도 마지못해 카즈윈과의 협력으로 밀레시안의 동침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밀레가 임무차 멀리 떠나게 되었으면. 이를 어쩌나 걱정이 한가득인 특별조를 두고 지금까지 계속 혼자 이러고 살았는데 괜찮다고 떠나는 밀레 역시 조금은 불안했으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날밤이라도 까볼까 고민하던 와중에 결국 피로가 몰려서 깜박 잠들어버린 밀레시안의 병이 도졌으면. 그리고 타이밍 좋게 도착한 이는 바로 알터. 아벨린이 준 특별 임무를 수행하고 게이트로 귀환하자마자 밀레의 소식을 듣고 쫓아온거였으면.

밀레시안님! 하고 부르는데 바로 쾅하고 볼에 작은 생채기를 내며 바로 뒤의 바위에 처박히는 아볼을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알터. 랜스를 다잡고서 신성력을 모으고는 그대로 밀레에게 돌진. 그러나 랜스는 아슬아슬하게 밀레를 코앞에 두고 바닥에 내던져지며 알터의 빈 손이 그녀의 두 손을 포박.

물론 밀레는 간단히 알터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함. 이마가 맞닿고 콧잔등이 부딪치는 거리에서 알터가 눈을 감으며 신성력을 끌어모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디바인링크까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밀레의 의식을 애타게 불러 잡아놓은 알터가 달빛 아래 햇살처럼 방긋.

어서오세요, 밀레시안님. 하는 맑은 얼굴에 천천히 정신을 차린 밀레가 와앙 울음을 터트려버리며 소년을 끌어안는 것으로 종결. 톨비쉬와는 서로 끌어안은 포옹자세, 카즈윈은 완전히 제 품에 밀레를 품듯이 안은 포옹자세, 알터는 서로 맞잡은 손을 가슴께로 당기든 안긴 포옹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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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하게 웃는 톨비쉬를 보며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밀레 보고싶다. 뭐, 뭐에요. 그 웃음은. 히익 오지마! 당신 누구야!(아슷5차지)알터는 원체 무해해서 환하게 웃을때마다 밀레는 마냥 흐뭇 오구오구하고. 카즈윈이 무해하게 웃으면 와. 이건 진짜 증거 남겨야돼 증거. 하면서 사진기 들이미는 밀레.

그리고 카즈윈은 결국 모처럼 찾은 웃음을 지우며 정색하고 카메라를 피해다니기 시작하는데...(본격 배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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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빈 방에서 찬찬히 그를 더듬어보다가, 그의 이름이 적힌, 밀레시안이 선물했던, 펜촉이나 손잡이 부분이 그의 손을 타 닳아버린 만년필을 발견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으면 좋겠다. 나는 또 누군가를 잃고 말았네요. 그게 당신이 아니었으면 바랐는데... 당신은 나로 인해 완전해졌다고 했죠.

나는 당신으로 인해 불완전해졌어요. 이건 당신 탓이에요. 알아요? 당신 탓이라고요. 나는 싫다고 했는데 당신 맘대로 겨우 다시 빈 공간을 채우고 또 우겨넣더니, 또 당신 맘대로 당신만 쏙 빠져나갔잖아요. 나는 또 불완전한 마음만 남았어요.

당신을 미워해요. 그러니까 잊지 않을거에요. 용서를 바란다면 꼭 돌아와요. 짜증나니까 제발이라고 빌지 않을거에요. 그 후로 성소에 꼬박꼬박 들러 편지 물린 부엉이를 날려보내고 가는 밀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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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앱 후기로 그거 보고 싶다... 특별조 애들 주기적으로 평가해서 보고서 내야되는데 로간 평가 보고서에 [요리가 친절하고 로간이 맛있어요!] 라고 써내는 바람에 톨비쉬가 평가 보고서에 사인하려다 말고 밀레 잡으러 튀어나가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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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조 애들 어화둥둥 내새끼 하는 밀레를 보고 톨비쉬가 "하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가족인 줄 알겠습니다." 했다가 아차싶었으면. 어디까지나 평화만이 감돈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 뱉은 실언이라 얼른 사과하려는데 밀레가 톨비쉬 스매쉬로 치고 뻗으려는걸 끌고 와 옆에 앉혔으면.

참내 본인은 내 가족 아닌거처럼 얘기하네. 하면서 손에 포크 스푼 들려주는 밀레의 장난어린 미소에 톨비쉬가 멋쩍게 쓴 웃음을 입에 물고 얌전히 땡땡이 소풍에 합류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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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시즌에 힘을 못낸 카즈윈 보고 싶다. 밀레가 잠 안자고 열심히 딴짓하면 용케 알아채고 일어나서 뒤에서 끌어안는데 이게 사지포박이나 다름 없어서 밀레도 핏줄서고 카즈윈도 핏줄서고 결국 씩씩 대면서 잠 다 깼다며 투닥거리다가 지쳐 잠드는게 일상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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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세요. 반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정말 하나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하는 톨비쉬와 

으왓, 저는, 그러니까, 밀레시안님... 웃으시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것같아요오오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시뻘개져서 옹알이하는 알터와

.....아.., 웃었다. 피식 웃으면서 밀레랑 정면으로 마주보고 웃는 얼굴 독점하는 카즈윈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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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밀레로 대놓고 밀레 덕질하는 알터랑 밀레팬클럽 회장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달달 외며 모든 활동 퇴근길을 지키는 톨비쉬랑 조용히 밀레 인생샷을 줄줄히 찍어내는 카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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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톨비쉬는 잘생겼으니까 피곤한 얼굴도 잘생겨서 밀레가 반칙이라고 짜증냈으면 좋겠다.(우루사 세마리 얹은 톨비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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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가 나도!!! 나도 간지나는거!!!! 마법 한다!!!! 하면서 시전했는데 랭크가 넘 낮아서 푸슈욱 하는거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배꼽잡고 구르는 멀린 자동상상됨. 밀레가 대삐침쇼를 시전하면서 고릴라표정하고 있으면 멀린이 야아.. 왜구래...삐치기눈..옆구리 찌르다가 슬쩍 자기 마력반지 쥐어주고..

하루는 밀레가 으어... 나오콜이 이제 없자나...ㅇㅁ;;;ㅇ 큰일나따..중얼거리는 소리듣고 그게 뭔 소리야? 의미를 물어본 멀린이 대격노하면서 너!! 너!!! 죽는다는말 쉽게 하는거 아냐!!! 새파랗게 어린게!!!! 얼굴 시뻘개져서 막 쒹쒹하더니 며칠 뒤에 불쑥 부엉이보냄..

작은 어뮬렛인데 헐 머야 이사람... 디바한테 보내려는거 나한테 잘못 보낸거 아님?? 하고 있었는데 수신인은 밀레가 맞고. 아싸 개이득 하고 차고 다녔는데 드래곤레이드 돌다가 디지기 일초직전인거. 막타 먹으면서 아 나오 불러야되나..ㅎㅎ...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포먹은것처럼 완빵으로 다 차고

시전한적도 없는 마나실드가 켜지는거임. 레이드 다 끝내서 살펴보는데 멀린이 준 어뮬렛이 와장창. 그리고 뒤에서 퐉 튀어나온 멀린이 야!!! 무슨 일이야!!! 하고 역정부터 내는거. 어.. 아니.. 드래곤 잡고 있었는데...ㅇㅁㅇ.... 아이템.. 이러면서 멍때리는 밀레 이리저리 살펴보고 안도하는 멀린.




*




나는 G20에서 피네 구하려다가 밀레가 이신화된 것도 좀 좋을거같음... 그건 좀 떡밥이었겠지만, 이렇게 사도가 될 수 있다. 라는 느낌의 떡밥이었겠지만... 결국 디바인링크로 구하지 못해 카즈윈도 같이 신성이 위협받는 사태에서 밀레가 카즈윈에게 막 배운 디바인 링크를 시전해서

피네의 모든 신성을 정화시키고 그 리바운드로 밀레에게 이신의 힘이 스며드는거지. 그렇게 밀레가 사도화가 된거 아닐까 해서 경악하는 두 사람 앞에 밀레의 사도화가 탁 풀리면서... 쓰러지고 이질적인 신성의 힘과 아튼 시미니의 신성이 함께 얽혀있는걸로 끝났어도... 좋았을거같음ㅇㅅㅇ




*




있지. 나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어. 결국 나는 나만 구했을 뿐이야. 나를 구하기 위해 팔라딘이 되었고, 더 큰 힘을 얻으려 다크나이트가 되었다가, 가진 힘을 지키기 위해 여신을 구했고... 끝도 없어. 나는 내 주변 어느 하나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부탁할게. 죽지 말아줘.

알터는 눈을 부릅뜨고 죽지 않아요. 밀레시안님도 죽지 않아요. 아무도 죽지 않아요. 그러니까, 절 버리지 마세요. 피가 엉겨붙은 손으로 랜스를 고쳐쥐고 기어이 신성개방해서 스킬 차지하고.

톨비쉬는 우리가 매우 잘 아는 그것... 신성력 개방하면서 쉴드 올리고 제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나는 끝까지 남아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결단코, 나는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카즈윈은 알아. 넌 그냥 지금처럼 널 구하면 돼. 피식 웃고 바람처럼 사라질듯. 하지만 후퇴나 도망이 아니라 밀레의 공격패턴을 너무 잘 알아서 기가 막히게 엄호하는거. 밀레가 쓰러질때면 또 귀신같이 나타나 공격을 튕겨내거나 저지하고 밀레가 다시 자세를 고쳐잡으면 또 사라져서 틈을 만들고.




*




밀레: 사랑한다 톨비쉬!!!!!!!!!!!

톨비쉬: 하하, 오늘도 밀레시안님은 건강하신 것 같군요. 일하러 갑시다.(질질

-

밀레: 사랑한다 알터어어!!!

알터: 저도요!! 꺄아 말해버렸어!!(손에 얼굴묻고 방방

-

밀레: 사랑한 읍읍!!!!

카즈윈: (질색(입막(납치




*




죽었다 살아나는 재주는 없지만 안죽는 재주는 있다며 이 세상이 멸망해도 밀레시안님 혼자 남겨두진 않을겁니다. 이러고 신나서 환하게 웃는 톨비쉬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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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yeon_sion

트위터에서 풀었던 스가른 썰을 정리했습니다.


"내가 아마 널 좋아하는 듯 하다."로 시작하는 우시스가. 뻔뻔한 페이스의 우시지마와 읭?하는 스가와 눈커져서 돌이 된 오이카와. 그리고 오이스가는 절찬 연애중의 설정.

여튼 오이카와 앞에서 그렇게 폭탄선언하고 걱정마라며 그냥 고백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순순히 물러난 우시지마가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유난히 더 스가를 떠올리는 실연느낌의 그것




*




안녕 꼬마야? 로 시작하는 카게스가 오이스가 쿠로스가 보고싶다. 스가는 제물로 바쳐진 아이, 이제 막 카라스텐구가 된 카게야마, 커다란 신목의 주인 오이카와, 꼬리가 아홉으로 갈라진 묘귀 쿠로오. 누가 이 맛있는 꼬마의 생기를 먹을까로 싸웠으면.

제물로 바쳐진 아이가 죽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죽는 순간 빠져나오는 생령을 흡수해야하는데, 셋 다 서로 안 뺏기겠다며 먹을 것도 주고 신당도 비워주고 입을 것도 주고 있음..... 결국 그렇게 열일곱까지 자라다가 열여덟의 생일에 굶주린 마을 사람들이 산까지 먹을걸 찾아 헤메다가 스가를 발견.

얘가 제물로 바쳐진지 언젠데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냐며 산 채로 묻어버리는데, 삶과 죽음 가운데에서 요마에 가까운 쿠로오가 그들을 저주하고 신령이나 다름없는 오이카와가 축복을 거두어버리고 그것을 신에게 보고해야할 카게야마가 입을 다물어버리며 그곳 자체를 없었던 곳인양 감춰버림

그러나 이미 꼬마스가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영이고.... 셋이 잠시 본의아니게 합심한터라 머리를 모아 내린 결정은 까짓거 우리가 키우지 뭐ㅇㅅㅇ 하면서 기묘한 동거가 시작됨. 물론 스가는 자기가 아직 살아있는 줄 알아야한다

스가는 물론 저 셋이 인간이 아님을 진작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해줬으면 좋겠다. 카게야마가 식사당번일 때는 좀 오래되어 생기가 없는 채소와 작은 고기, 오이카와는 나무열매, 쿠로오는 무조건 고기나 생선인데 비린내 심해서, 스가가 강하게 키워지고...

스가는 자기가 운좋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생령이기에 열여덟 모습으로 계속 남아있는데 어느날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자신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걸 알게 됨. 당연히 하는 호흡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쿠로오가 물 질색하지만 뛰어들어서 구해줬는데 멍해있는 스가...

뒤늦게 달려온 오이카와가 기꺼이 소맷단으로 산들바람을 불어주지만 스가는 이미 딴세상멍때림 후다닥 날아와 제 날개로 덮어주려던 카게야마한테 갑자기 달려드는 스가. 반사적으로 할퀴거나 밀지는 않았지만 발톱이 나오는건 어쩔수가 없는데 스가가 기다렸다는 듯 제 손을 스치고 피는 나오지않음

아... 나 죽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려던 찰나에 쿠로오가 천연덕스럽게 넌 다시 태어난거야. 여우 못지 않은 세치 혀를 놀렸으면... 무엇으로? 동그래진 눈으로 묻는 스가를 훑어보면서 씨익 웃고는 그걸 우리가 알아보려고 함께 있는거야. 그렇게 스가의 자아 찾기가 시작되는데(????




*




한때 마이붐이었던 이와스가 못지 않게 맛층이랑 스가가 매우 보고싶다. 한참 오래전에 오이카와랑 사귀었다가 오이카와가 프로 데뷔하면서 헤어졌다는 기반으로. 헤어지는 것을 가장 쉽게 하는 방법은 눈으로부터 먼저 멀어지는거니까 스가가 배낭여행을 갔으면 좋겠다.

첫 여행지는 로망가득한 영국. 일부러 볼거리가 많은 탓도 있어서 카메라 하나 들고 그냥 평범한 거리부터 해서 공원산책과 미술관, 박물관을 정신없이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그동안 내내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평범한 동양인 관광객을 바라보는 시선이겠지 치부했으면.

그리고 어느날 그 시선의 정체를 알게 되는데.. 공원에서 해사하게 웃는 어린 아이를 보고 사진촬영 허가를 받은 뒤, 촬영을 하는데 아이가 들고 있던 풍선이 날아가버린거. 사진찍던 스가의 뒤로 팔랑팔랑 날아가는 바람에 스가도 풍선 잡을 타이밍을 놓쳤는데, 어이쿠. 하면서 풍선을 잡아준건 맛층.

고맙다고 인사하다가 고개를 든 스가는 멈춤, 풍선을 잡고 아이에게 건네준 맛층도 흐응? 하면서 웃는 얼굴로 갸우뚱. 너, 너, 너, 하고 말잇못하는 스가를 보며 어. 나 네가 아는 마츠카와 잇세이가 맞을걸?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너 왜, 너 왜, 하는 얼굴에 대고 나? 나도 여행이지.

태연하게 물으려던 말을 가로채 대답하는 맛층. 어쨌든 반갑다. 이런데서 다 만나네. 하고 제법 뻔뻔하게 인사하고 얼결에 차도 한잔 마시고 헤어지는데, 호텔에서 체크인 하다가 바로 옆에서 또 만나는 맛층... 얘 뭐지. 하고 동공지진 일으키는 스가한테 오, 잘 됐다. 너 영어 잘해?

아무렇지 않게 도움까지 받고서는 이야, 고맙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해죽을 뻔 했네. 보답으로 내일 점심이라도 사줄게./아니;; 괜찮.../아, 너도 조식 포함이야? 잘 됐네. 나 혼자 밥먹는거 영 어색해서.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어딜 봐도 혼자 밥 잘 먹을 것 같은데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스가.

이런 느낌으로 영국 일정을 같이 소화하는 사태에 이르는데... 영국 일정이 끝나고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이제 진짜 안 만나겠지... 했는데, 프랑스 쪽 호텔 로비에서 스가와라?? 이야~ 이쯤 되면 운명 아냐? 따위를 인사로 건네는 맛층과 또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




요즘 마비 기사단에 빠져있어서... 하이큐도 기사단 보고 싶다. 성기사단으로 대표적인 4개의 전투조와 시작과 끝의 조, 정보조 총 6개의 조로 구성. 검과 랜스를 주무기로 하여 최강 물리공격력을 자랑하는 시라토리자와. 모든 마법과 연금술의 결정체 최강 마법공격력의 아오바죠사이.

빠르고 넓고 정확한 방어력을 구사하는 다테. 인술의 급습과 체인의 속박 전혀 다른 두 분야를 완벽히 소화하는 카라스노. 이상 전투조 4개. 성기사를 발굴 및 육성하고 은퇴한 성기사를 지원하여 기사단의 맥을 "잇는" 네코마. 온 세상에 눈과 귀 그리고 직감을 겸비한 막강 정보조의 후쿠로다니.

기르가쉬가 3대나 몰려오는데 침착하게 선두에서 모니와의 지휘에 따라 전체 실드부터 두르는 다테조. 맨 뒤에서 여유롭게 마법진언 외는 오이카와와 아이스 파이어 썬더 그리고 힐차지까지 끝내는 아오바조. 실드를 겹겹이 싸고 나서 다테가 한발자국 물러나면 기다렸다는 듯 우시지마부터 랜스차지.

그리고 몇몇은 파힛 걸어서 양손에 든 블레이드에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기고 일제히 튀어나가 몸빵때리기. 그리고 오이카와가 외었던 진언이 기르가쉬의 바닥에 요란한 마법진을 그리면서 혜성을 떨어트리고, 광화시점이 다가오면 카라스노가 기르가쉬 3대를 모두 둘러싸 체인으로 팽팽하게 묶음.

필살기를 절묘하게 막아 속박하고서 시야를 가리며 급소부분을 정확히 노려 기절시키고 공격력을 극대화함. 그렇게 기르가쉬 다 물리치고 나면 왜 자기네들 공적이 적냐며 조장들끼리 입씨름하고 정작 조원들은 아 배고프다 저녁뭐지... 따위를 중얼거렸으면.




*




오이스가로 아이돌 오이카와 납치한 스가 보고싶다. 불편할까 포근포근한 담요로 덮어놓은 무중력 의자에 묶어놓고 따뜻한 온열안대에 제일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천장가깝게 방음 창문설치해서 일광욕도 해드리고, 삼시세끼 맛있는 식사에 간식도 챙겨드리고... 도대체 뭐가 목적이냐는 물음에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별 건 없고, 저랑 한번만 해주세요. 물론 오이카와는 앞이 안 보이지만 이 납치범이 뻔히 남자라는건 잘 알겠어서 ????? 이 상태이고 스가는 꺄 말해버렸다 하면서 방방. 실은 얼굴이랑 스타일은 정말 제 취향인데 성격은 취향이 아니라서 고민 많이 했어요. 오이카와 ???남발쇼




*




쿠로스가로 동양판타지.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한 검은 고양이 쿠로오를 역시 하얀 까마귀라고 카라스텐구들에게 따돌림 당하던 스가가 주워서 치료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결국 죽고 스가는 슬퍼했는데, 쿠로오는 묘귀로서 다시 태어나 이번엔 반대로 스가를 돌봐주었으면.




*




아주 희박한 확률로 후타나리가 태어난다는 설정으로... 남성베이스에 여성기, 여성베이스에 남성기 두가지 종류를 합쳐도 소수점에 가깝게 태어나는데 스가가 후타나리인거. 어렸을 때부터 가족 단체로 꾸준히 교육받아왔고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는데 도쿄 합숙때 스트레스로 생리가 일찍 터져버린거.

헉 *발하는 타이밍에 기막히게 쿠로오가 여어~ 하고 뒤에서 다가와 야 너 바지터진듯 하면서 제 허리에 묶었던 저지 벗어서 스가 허리에 둘러줌. 동공강진하는 스가한테 귓속말로 생리대 챙겨왔어? 하고 물어봐주고 셔츠 갈아입고 아이스크림 사러가자며 같이 숙소 올라가줌.

속옷이랑 이케저케 정리하고 나오는 스가가 무거운 얼굴로 어떻게 알았어? 하는데 벽에서 기대서 기다려주고 있던 쿠로오가 씩 웃으면서 감이야. 가자. 하고 스가 걸음에 맞춰 천천히 슈퍼에 가고... 아이스크림 고르고 있어봐, 하더니 갑자기 사라진 쿠로오.

애들수만큼 아이스크림 골라서 선생님 카드로 결제하는데 오, 딱맞춰 왔네 하면서 작은 봉지 달랑달랑 손목에 걸고 와서 그걸 스가 손에 쥐어주고 아이스크림 봉투 세개를 번쩍 들어서 앞서 가버리는 쿠로오. 뭐지싶어서 쥐어준 봉투 열어보니 진통제와 사이즈별 생리대. 그리고 단짠맵 과자 한봉지씩.

뭔가 멍해져서 바라보다가 후다닥 뒤쫓아가는데 쿠로오가 어어어 천천히 와. 귀한 몸이신데~ 하고 키득키득 웃고, 스가는 듣는둥마는둥하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퍼억. 악하는 쿠로오의 손에서 봉투 하나 뺏어들고 돌아감. 다들 스가의 또다른 봉투를 보며 손가락질하니까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졌거든.

능청스레 거짓말하는 쿠로오. 그리고 쿠로오가 챙겨준 진통제를 먹었지만 악몽의 둘째날에 빈혈까지 겹친 스가. 결국 패널티로 플라잉 리시브하다가 잘못 넘어져서 그대로 못 일어나고 도대체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불쑥 나타난 쿠로오가 야 얘 더위먹었나봐. 아침부터 안색 안좋더라니.

그렇게 안아서 바람 잘드는 구석에 비스듬하게 눕혀주고 찬물로 적신 손수건 눈 위로 덮어줌. 많이 안좋아? 슥 물어보는 목소리도 목소리고 마냥 밑빠질것 같아서 죽겠는 스가가 으응. 아파. 엄청 아파. 낼 것 같지 않은 투정을 부리자 쿠로오가 네 덕 좀 보자. 하더니 무릎베개 해줌.




*




오이스가로 아이돌 오이카와와 그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스가 보고싶다. 오이카와, 스가, 카게야마 셋이서 함께 연습생 시절을 보냈는데 정작 데뷔한건 오이카와와 또다른 기획사로 간 카게야마뿐. 스가는 비쥬얼로 히트성이 없지만 가창력이 뛰어나서 오이카와의 뒤에서 작곡과 노래만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오이카와의 실적으로 발표되었으면. 그 사실을 아는 건 카게야마뿐으로 선배, 그냥 저희쪽으로 오세요. 그딴일 그만두세요. 선배의 반짝임을 저는 알아요. 하지만 스가는 오이카와의 반짝임에 이미 매료된 상태였고, 어느새 제 목소리를 오이카와의 것으로 착각하기에 이름.

그리고 오이카와는 그것을 미안해하다가 점차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스가를 이용함. 점차 프라이빗매니저도 하지 않을 잔심부름까지 스가에게 시키면서 자존감이 점점 사라진 스가. 어느날 카게야마의 단독 콘서트 영상을 우연히 보게된 스가가 그제야 또르륵, 완전히 잠수를 타버리고.

갑자기 카게야마도 단독콘서트 투어를 끝낸 후 은퇴를 선언. 연예계가 발칵 뒤집히는데 연이어 카게야마가 연인과 함께 해외에 거처를 잡았다는 찌라시까지 돌면서 두번 발칵. 그리고 그 연인의 사진으로 뜬 것은 바로 스가. 첫번째 발칵에 환호를 지르던 오이카와가 이번엔 눈이 뒤집힘.

그리고 무작정 쫓아간 집에서 행복하게 웃는 둘의 모습을 보고 완전한 패배감에 빡침. 무작정 들어가서 스가 손을 잡아끄는데 스가가 처음으로 단호하게 싫어. 라고 눈 똑바로 보고 거절했으면. 그리고 오이카와의 닦개짓이 시작되는데... 물론 카게야마 속앓이도 시작됨.




*


1.

스가와라 코우시는 아역부터 착실히 올라온 유명배우이다.

사와무리 다이치는 스가와라의 기획사 대표로 둘은 오랜 친구이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스가와라와 같은 기획사이며 아이돌 그룹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2.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와 라이벌 격인 타 아이돌 그룹의 리더이며, 스가와라와는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다.

쿠로오 테츠로는 모델 출신으로 예능에서 스가와라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정통 연기자집안 출신으로 스가와라보다 훨씬 지지도가 높은 국민배우이다.

3.

위 6명의 인물의 관계도를 따져보자면, 스가와라 코우시가 중심이다.

4.

스가와라가 쉬는 날에는 꼭 사와무라와 함께 있었다. 둘은 오랜 친구이니 팬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5.

스가와라는 같은 기획사 동료들 중에 카게야마를 가장 예뻐했다. 그 증거로 둘은 팔찌나 티셔츠, 혹은 넥타이에 이르기까지 패션아이템을 종종 맞추곤 했다. 팬들은 설렌 의심이 들끓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6.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나서부터 오이카와는 인터뷰때마다 스가와라를 칭찬했다. 스가와라에 대한 질문이 없어도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결국 인터뷰어가 참다 못해 그렇게 스가와라 씨가 좋냐고 묻자, 오이카와는 망설이지 않고 그가 하는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며 고백했다.

7.

쿠로오는 스가와라와 함께 출연했던 예능이 두 사람의 케미로 제법 대박을 터트리면서 더욱 예능 프로에 자주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스가와라와 함께였다. 예능 작가들 사이에서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먼저 섭외하면 쿠로오 테츠로가 무조건 따라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8.

우시지마와 스가와라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와무라 다음으로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 동료임에는 변함없었다. 사석을 따로 가져 만난 적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만나는 자리에서 자연스레 포옹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포옹에 비쥬까지 추가되었다.

9.

스가와라 코우시의 팬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




어느 날 택배 하나를 받았다. 아주, 아주 오래된 수첩이었다. 손바닥만했고, 그냥 까만 가죽 표지의 수첩이었다. 펼쳐보자 딱 한 마디만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적어도 잘못 온 택배는 아니었다. 틀림없이 내 이름이었다. 글씨는 단정했고 약간 동글동글해서 귀여웠다.

그 수첩은 한참동안이네 내 서랍에 대충 박혀있었다. 그 뒤로는 읽을 자신이 없었다. 누가 보냈을까. 그 의문만이 머리를 맴돌아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벌써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수첩은 적어도 10년 이전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성소수자이다. 그것도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보수적이라면 손에 꼽힐 그런 나라의 국민이자, 하필 그 일본에서도 구석에 박힌 미야기라는 촌구석에서 태어나 반평생을 살아왔었다. 나는 그런 곳에서 이른바 커밍아웃을 했고, 도망치는 선택지 이외를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도망쳤다. 그리고 도피처에서나마 자유로웠다. 이따금 과거는 추억의 탈을 뒤집어 쓰고 나를 조롱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나를 찾아준 친구를 버리지 못했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몇 번, 과거의 친우들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이윽고 후회했고 도돌이표를 찍었다.

나는 사람과 더 사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법 괜찮은 방법이었다. 결국 나는 육체적 외로움을 버렸고 정신적 외로움을 충족시켰다. 적어도 침대 위에서 상상으로 즐기는 위로는 그 누구도 모를테니 좋은사람을 연기하기에 딱 적당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고백은 곤란했다. 나는 누구인지 기필코 알아낼 것이다. 알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근접한 이를 골라 대입하고, 떠올리고, 나 혼자 앓을 것이다. 그것은 싫었다. 마른 장작을 등에 이고 불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술 이기는 장사는 없었다.

빌어먹게도 기분좋게 들이부었던 회식 자리의 술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추악한 외로움을 천천히 배양해냈다. 집에 돌아와 기어이 맥주 몇 캔을 비워버린 나는 쓸데없이 솟은 용기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합심하여 다음 장을 펼친 순간, 술이 확 깨어버리고 말았다.


1.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걸까?

펜을 열고도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었을까. 처음의 몇 획은 잉크가 드문드문했다. 그의 고민은 천천히 계속되었다.

2. 맞아. 역시 나는 너를 좋아해. 그렇지 않고서야 네 얼굴이나 네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서 깜짝깜짝 놀라는 걸 뭐라고 설명해?

이번엔 투정이다.

3. 좋아해.

4. 쓰고 나니 시원한데 부족해.

5. 방금 직접 말해봤는데 이건 오버였던 것 같아.

6. 심장 터지겠네.

(연달은 고백에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7. 새삼 고백하는 애들이 존경스러워졌어. 놀려서 미안해. 정말 대단하다, 너희.

8. 열이 엄청 나서 찬물로 세수했어.

9.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

10.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만 이런 건 불공평하잖아.

(만약 내 앞에 있었더라면 그는 저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손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혀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결국 나도 찬물로 세수하러 일어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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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2018년 1월 대운동회에 회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셀 수 없이 많은 말 중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스가와라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아래로 떨군 뒤 엇차,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품에 안아 올린 아이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오물거렸다.


  “이제 집에 가자. 저녁 먹어야지.”

  “아빠가 츠바사 먹는다아.”

  “애피타이저야.”

  “애피타이저?”

  “식사 전에 먹는 요리.”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아이를 더없이 상냥한 미소로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여전히 멍해 있던 카게야마에게는 씩 장난을 거는 양 웃어 보였다.


  “오늘 저녁은 카레야.”


 먼저 몸을 돌려 보이는 등을 따라 카게야마는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꺼내기보다 천천히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스가와라는 익숙하게 아이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일까지 해야 할 숙제나 업무 따위를 늘어놓았고, 어느새 카게야마도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2층으로 된 작은 주택맨션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그래도 새로 한 페인트칠의 흔적은 나쁘지 않았다. 삐걱삐걱 밟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철제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월세 문의’ 종이가 붙은 문 하나를 지나 그다음 문을 열었다.

 집은 적당했다. 그러니까 스가와라와 츠바사, 그리고 그의 남편 혹은 아내까지 세 명의 가족이 살기에 딱 적당히 넓었다. 괜히 자신이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싶은지 카게야마는 현관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스가와라는 뒤늦게 아차 싶어 어색하게 눈썹을 찡긋거렸다.


  “미안, 좁지?”

  “아니요. 아늑해요.”


 서둘러 고개를 젓고 신발을 벗은 카게야마는 주춤주춤 들어서며 스가와라의 표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들어가길 망설이는 태도에 속이 상하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의도였다. 그새 바닥에 이리저리 늘어트린 허물을 하나하나 주워가며 스가와라는 가벼운 잔소리를 던졌다.


  “츠바사, 손발부터 먼저 씻어!”

  “네에─”


 푸다다닥 부산스레 화장실을 향해 뛰어가는 소리가 제법 귀여웠다. 인형 옷처럼 자그마한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걸어둔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에게도 손을 뻗었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아직도 츠바사의 공이 제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하기는, 속으로 저 자신에게 기어이 한소리를 하고 아주 약간 바람이 빠진 공을 스가와라에게 건네주는 카게야마였다.


  “고마워. 퇴근이 늦어져서 장보고 요리하다 보니 시간을 못 봤지 뭐야. 어두워져서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산책하고 있었거든요.”

  “코트 줄래?”

  “네, 감사합니다.”


 베란다 문을 약간 열어 공을 휙 하니 구석에 대충 던져 놓은 스가와라가 다시금 손을 뻗어왔다. 후다닥 코트를 벗으려는 카게야마를 쉬이 거들어주는 손길이 스가와라의 향기를 함께 가져왔다. 스치듯 가까워진 향기를 마저 그리워하기도 전에 냉큼 멀어진 그를 원망할 수 없어서 카게야마는 허공만 쥐었다가 풀었다.


  “카게야마도 손 씻고 와.”


 짐짓 엄한 잔소리는 빠지지 않았다.

 카레에는 당근, 감자, 양파, 치킨이 들어있었고 그 옆에 계란도 빠지지 않았다. 좌식 밥상을 빼곡히 채운 세 그릇의 카레가 깨끗하게 비워지는 동안 셋은 그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그러나 무거운 공기는 없었다. 카게야마와 츠바사는 온전히 카레를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츠바사의 입가와 수저 잡는 손에도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챙기려던 스가와라의 손을 카게야마가 천천히 그리고 지그시 눌러 잡았다. 일순 그의 손끝이 떨렸지만 피하는 일은 없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 괜찮아.”

  “제가 할게요.”


 다시 뻗어오는 하얀 손을 힘주어 잡으며 카게야마도 다시 강조했다. 뒤늦게 겹쳐 잡은 손을 의식한 카게야마가 후다닥 손을 거둘 때까지 스가와라는 손이 붙잡힌 채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느라 바빴다.

 한참이나 낮은 싱크대에서 몸을 숙여가며 겨우 설거지를 끝낸 카게야마는 젖은 손을 닦아가며 눈짓으로 제 코트를 찾았다. 그런 그를 바로 알아챈 스가와라가 순순히 그에게 코트를 건네주는 일은 없었다. 언제 끓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포트를 기울여 차호에 내리고선 찻잔까지 꺼내두었다.


  “차라도 마시고 가.”


 눈앞에 다 차려진 성의를 대놓고 무시할만한 철면피가 카게야마에게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던 자리 그대로 다시 엉덩이를 붙인 그는 구수한 향이 담긴 찻잔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잡았다. 따끈한 기운이 손을 타고 차분히 퍼져나가는 감각은 역시 거절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카게야마는 주춤주춤 입을 열었다.


  “그…, 결혼, 축하드려요.”

  “……어?”

  “제가 계속 바빠서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요.”

  “……아.”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린 츠바사를 힐긋 내려다보던 스가와라가 피식 쓴웃음을 걸었다. 계속 제 입술을 훑던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야. 나 결혼 안 했어. 애만 낳았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말을 두어 번 곱씹더니 당황한 모양새로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뜨거운 김이 이제 막 완전하게 가신 차를 입안에 털어 넣다시피 마시더니 부쩍 식은땀이 고이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그럼 아이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저 스스로 후다닥 입을 닫은 카게야마도 힐끔거리며 츠바사를 주시했다. 그도 그럴 듯이 남성 임신은 여성 임신보다 생명 위험 부담이 훨씬 컸다. 임신 성공 확률이 같을지라도 여성 임신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큰 이유였다. 츠바사는 여전히 티스푼을 입에 넣은 채 쪽쪽 거리면서 슬슬 바닥을 보이는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응, 내가 낳았어. 어쩌다 보니 혼자서.”

  “그럼 그 다른 쪽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꺼낸 다른 질문은 끝맺지조차 못했다. 그럼에도 스가와라는 싱긋 웃어 버렸다. 그리곤 다 비운 아이스크림 컵과 티스푼을 막 내려놓은 츠바사를 와락 끌어안고 동글동글한 머리에 제 볼을 부벼댔다.


  “우리 츠바사는 누구 아들?”

  “우리 아빠 아들!”


 화목한 두 부자를 보던 카게야마 역시 옅은 미소를 걸고 바닥에 아주 조금 남은 차 몇 방울을 털어 넣었다. 이어서 시간을 확인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찾았다.


  “저 이제 가볼게요. 역 근처에 호텔이 있긴 한데, 조금 걸어야 해서…….”

  “아, 그래. 코트 여기 있어.”


 한창 츠바사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문지르던 스가와라가 벌떡 일어나 한쪽에 잘 걸어두었던 카게야마의 코트를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손이 살짝 스쳤고, 손끝을 움찔하며 먼저 피한 건 동시였다. 반사적으로 마주친 시선에 스가와라는 웃어 버렸고, 카게야마는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어색한 둘 사이에서 활달한 사람은 츠바사 한 명뿐이었다. 스가와라의 다리 한쪽을 꽉 끌어안고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표정이 없는 듯 보여도 눈만큼은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과 활기로 반짝반짝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스가와라처럼.


  “조심해서 가.”


 계단까지 바래다주려던 배려가 무색하게 츠바사는 스가와라의 다리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아주 옅은 미소 한 번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로 무례하지 않게 배려를 거절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쉬워하는 스가와라에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카게야마는 저벅저벅 빠른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나마 문을 연 채로 카게야마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던 스가와라가 아주 작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쟤는 왜 아직도 잘생겼냐.”


 그 시각, 용케 길을 잃지 않고 큰 길가로 나오던 카게야마는 냉장고에 갇힌 냉동식품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날 선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코트를 더 바싹 추키던 카게야마는 호텔로 들어가기 직전, 불이 밝은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이다 들어간 편의점에서 카게야마는 카레 만두 한 개, 맥주 한 캔을 가지고 나왔다.

 치익─

 듣기만 해도 경쾌한 소리였다. 그냥 탄산음료를 열 때도 시원한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맥주였다. 배구 이외에 선택지 없었던 카게야마였기에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몇 번 기회가 있기야 했으나 그마저도 한 손안에 꼽을 정도여서 카게야마는 이제 막 꼭지를 연 맥주캔 자체가 신기하게 보였다. 몽글몽글 올라오는 맥주 거품을 머금어보고, 이어서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언제나 마시던 물이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듯 무의식적으로 목 안쪽으로 음료를 넘기던 카게야마가 다시금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한바탕 기침을 쏟아냈다. 스치고 내려간 탄산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다른 문제였다


  “윽, 써…!”


 기침이 겨우 멎고 카게야마가 할 수 있는, 하려던 말은 고작 한 마디였다. 핑 도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며 카게야마는 아직 남아있는 잔기침을 완전히 털어냈다. 기껏 한 모금 마신 맥주를 버릴 수도 없어 잔뜩 찡그린 채 캔을 살펴보던 그는 다시금 입술을 대고 음주를 시도했으나, 이번엔 반 모금도 채 입안에 담지 못했다.

 결국, 개수대에 남은 맥주를 전부 쏟아버리며 카게야마는 멍한 시선으로 수챗구멍을 응시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환한 미소와, 환한 목소리와, 환한 첫사랑, 그리고 그를 닮은 그의 아이가 선연해서 카게야마는 다른 잡념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모든 생각과 기억이 새하얗게 덧칠되어 겨울보다 더 황량한 생각에 스가와라라는 봄이 침범해 들어왔다. 봄을 들인 사람은 카게야마 본인이었으니 그를, 혹은 다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한 번 침범한 봄은 제 자리를 카게야마가 알아채지 못하게, 조금씩, 빠르게, 넓혔다.

 마치 빛바랜 흑백영화의 장면 하나하나에 색이 깃드는 감각이었다. 까만 화면에 하얀 자막도 각자 제소리를 찾아 돌아와 귓가를 윙윙 울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추억들이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원래대로 돌아와 카게야마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뒤덮었다. 

 맥주 거품이 군데군데 엉킨 수챗구멍을 들여다보던 카게야마는 아귀힘만으로 캔을 가볍게 구겨버렸다.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은 캔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카게야마는 빈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아아…….”


 그의 귓가는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죄책감을 토해내듯 연이은 한숨을 흘리던 카게야마는 사레와 기침 덕에 한참 침착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가슴이 뛰지.”




이후 내용은 2018년 01월 13일에 발행된 해바라기 책에서 완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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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2018년 1월 대운동회에 회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밤새 팔 안에 가두었던 잿빛의 열기를 찾던 카게야마는 예상과 전혀 다른 한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불은 여전히 덮여있었지만, 곁에서 잠들어 있어야 할 또 다른 신체가 없었다. 가녀리다고 할 수 없지만 카게야마의 품에는 충분히 적당한 잔 근육, 만지고 쓰다듬을수록 솔직하게 반응하는 남성의 몸이 없었다.

 시각은 정오에 가까운 오전 10시를 막 지났고, 스가와라의 이름으로 예약되어있을 이 방에 그는 물론 그의 짐들도 몽땅 사라졌었다. 카게야마는 홀로 남아있었다.

 그 즉시 느낀 감정은 역시나 당황이었다. 샤워하고 나와서도 계속 멍한 상태로 있던 카게야마가 전화라는 수단을 생각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한 밤이 되어서였다. 전화하려다 말고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다음 날이 되었고, 겨우 생각을 정리해 전화를 걸었을 때는 카게야마에게서 남은 스가와라의 연락처조차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이 흘러나왔다.

 이때쯤 되어서는 걱정이 일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었나, 혹은 스가와라가 갖고 있던 상상과 현실이 매우 달랐을까. 카게야마 혼자만 끙끙 앓던 고민이 결국 얼굴로 드러난 것은,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도쿄의 대학을 위해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였다. 그의 옆자리에는 히나타가 앉았는데, 한창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나 싶더니 곧 풀이 죽었다.


  “뭐 잊어먹고 안 챙겼냐?”

  “아니거든!”


 무작정 빽 부정하며 목소리부터 높이던 히나타가 제풀에 놀라 두 손으로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캐묻지 않은 상세한 내용을 신나게 풀었다.


  “스가와라 선배가 마중 나와 주시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신대.”

  “잠깐만. ……뭐?”


 여기서는 살짝 화가 났다. 그것에 대한 반증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본 히나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화를 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는 수준이 심각했다.


  “내내내내내내내가 마중 나와 달라고 떼쓰진 않았어!”

  “스가와라 선배하고 연락했어?!”

  “……어, …어? 연락했지.”


 카게야마가 화를 내는 방향이 예상과는 전혀 달라 히나타는 언제 겁을 집어먹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도리어 속이 터지는 모양새로 카게야마는 무거운 숨을 연신 들이마시며 삭히기를 반복했다. 쩔쩔매던 히나타에게서 스가와라의 새 메일 주소와 번호를 받아내기는 했지만, 막상 연락을 시도하지 못한 카게야마는 점차 스가와라에 대해서 잊어갔다. 

 정확히 말해서 잊기 위해 더욱더 배구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정말 원하던 대로 스가와라에 대해서 잊었고, 그 날 밤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게 되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속담 그대로였다. 시간이 답이었다. 시간은 느린 듯 빠른 듯 제멋대로 흐르면서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 대해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게 했다. 영락없이 스가와라를 다시 찾아야 할 때라고 그를 부추기는 꼴을 카게야마는 그저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이 수긍했으니 그 이후로 이어지는 행동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카게야마는 후쿠오카로 가는 열차 탑승권을 결제했고, 무언가 하려는 의욕을 보여서일까 그의 부모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다 풀지도 않은 짐을 가볍게 간추리고서 무작정 나선 생애 첫 여행은 우울함의 얼룩을 지워내기에, 충분했다. 

 한결 시원해진 기분을 만끽하면서 카게야마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설레는 양, 긴장인 양,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보던 카게야마는 결국 바깥 경치에 눈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하다 문득 차창에 비추어 보이는 제 모습을 알아챘다. 무표정 어딘가에 잔뜩 고양된 모습이 위화감을 불러일으켰고, 카게야마는 썩 싫지 않아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어서 차분히 눈을 감은 그는 겨우 떠났던 도쿄를 지나 환승까지 거쳐서야 후쿠오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완벽히 모르는 곳은 아니었다. 원정 경기 혹은 훈련을 위해 몇 번이나 와보았을 도시였다. 다만 당시의 카게야마가 어디인지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인구에 비례하듯 시끌시끌한 시가지를 뒤로하고 카게야마를 태운 택시가 한적한 마을로 향했다. 행선지의 초이스는 다행스럽게도 사와무라였다. 

 처음에는 스가와라에 대해 절대적으로 함구하려던 사와무라가 첫 마디를 뗀 것은 카게야마가 후쿠오카로 떠나기 전날 밤에서였다. 몇 번이고 메일을 보내려다 말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로 전화를 걸어버린 것이다. 저 내일 후쿠오카 갑니다, 무작정 시한폭탄처럼 던진 첫 마디를 두고 사와무라는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연거푸 얕은 한숨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사와무라는 순순히 스가와라가 있을 만한 곳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에 대해 더없이 나긋해진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답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사와무라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영 불편한 기색은 매우 잘 느껴졌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다시 한번 더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제 고집이었으므로.

 호텔은 촉박하게 예약한 방치고 제법 아늑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점심 무렵이었다. 열차 안의 쪽잠이 무색하게 낮잠을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조용히 지갑을 챙겨 들고 식당을 찾기로 했다. 아무 예정 없는 미래에 언제든 잠은 잘 수 있었지만, 손안의 모래처럼 쉬이 빠져나가는 스가와라를 찾기에는 시간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찾아야 했던 시기를 그냥 보내버린 탓에 한참 늦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카레 집을 찾아 뒤늦게 몰려드는 허기를 채운 카게야마는 주변 지리를 익힐 겸 산책을 나섰다. 벌써부터 적당한 저녁거리를 떠올려보던 그의 걸음은 느긋했고, 정처 없었다. 그러다 찾아낸 공원은 자연스럽게 벤치를 찾아 멍한 정신을 추스르기에 딱 알맞았다.

 공원의 분수에는 수시로 물방울이 퍼졌다. 바람은 가볍게 나뭇잎 사이를 스쳤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높아졌다. 평화로운 그림을 감상하듯 새삼 하나하나 훑어보던 카게야마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잔뜩 신이 난 아이들이 공을 던지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혹 저들끼리 정해놓은 규칙을 어길 때면 손가락질을 하며 꿀밤을 먹이기도 했다. 그러다 잡기 놀이로 변질되는 것은 예사로 보였다. 본인의 어렸을 적 향수가 겹쳐 보이는 감각은 간질간질해서 한동안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마저 뉘엿뉘엿 저무는 해 질 녘에 접어들자, 한 명씩 각자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카게야마와 꼬마 남자아이 한 명뿐이었다. 양 볼이 부풀어 뚱한 얼굴로 세상 심각하게 제가 든 공을 내려다보고 있던 꼬마 아이는 매우 익숙했다. 영락없이 거울에 비친 제 얼굴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어둑해진 석음에 퍼뜩 꼬마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시선이 걱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약간의 경계를 담아 주변을 살피고, 경찰서에라도 데려다줘야 하나 아니면 보호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잠시 아이의 손안에서 공이 빠졌다. 카게야마의 발치까지 데구루루 굴러온 공과 아이를 번갈아 보던 그는 천천히 그 공을 들고 아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몇 발자국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던져줄까, 건네줄까를 고민하던 카게야마의 귓가에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카게야마를 향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향한 부름이었다.


  “츠바사!”

  “……아빠!”


 돌아보는 것은 동시였다. 아이와 카게야마가 동시에 바란 목소리의 주인공이 거기에 있었다. 환하게 웃는 겨울의 남자가 양팔을 뻗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게야마가 남자를 보았고, 남자가 카게야마를 보았다. 서로 바라보던 둘 사이에서 먼저 흐름을 끊은 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기꺼이 몸을 낮춰 앉으며 다시금 한겨울 햇살처럼 웃어 보였다.


  “츠바사. 이리 와. 많이 기다렸어?”

  “…….”


 카게야마가 지켜보았던 시간보다 훨씬 더 아이들과 뛰놀며 기다렸을 오랜 시간을 아이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함축해버렸다. 두 팔을 벌려 쪼르르 달려온 아이를 품에 꼬옥 안은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카게야마를 다시 보아주었다.

 그때까지 카게야마는 자리에 뿌리를 박은 듯 가만히 서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 미묘하게 얽힌 표정에서 놀람은 아주 적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감정들을 읽기에 그 두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카게야마는 쉽게 마법의 주문 같은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부를 수 없는 금기처럼 느껴졌다.


  “안녕, 카게야마.”


 금기는 먼저 금기를 깼다. 이번에는 카게야마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스가와라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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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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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대운동회에 회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돌아온 고향은 기억보다 상당히 많이 변해있었다. 번화가가 더 현란해지고 넓어졌으며,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팎으로 옛 정취가 약간 변색하여 있었다. 미리 짐을 보내놓았어도 양손 가득 들린 무게감이 카게야마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그를 힐긋거리며 몰래 사진을 찍는 광경을 보아서 몰래 왔다는 것이 무색할 만치 다음날 신문의 대자보가 자동으로 연상되었다. 아니, 대자보에나 나오면 다행이겠지. 이제 카게야마는 한물 지나간 가십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다. 

 괜찮다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기어이 마중을 나온 부모님에게 간신히 인사만 드린 카게야마는 뒷좌석에 앉아 멍하니 그늘져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날이 추워지고 어두워지면서 평소보다 일찍이 드리워지는 간판의 빛이 흐리멍덩한 시야를 때렸다. 잠시 눈을 감아보려는 시도는 막 주택가로 들어가려는 골목에서 멈추었다. 

 익숙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아마도 어쩌면 카게야마보다 훨씬 더 스가와라와 가까웠을 사람들이었다. 순간 이어진 의식에 눈을 빛낸 카게야마가 잠시 차를 정차시키고 골목을 거슬러 뛰어나갔을 때, 앞뒤 잴 것도 없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이치 선배! 아사히 선배!”


 깜짝 놀라 카게야마를 돌아보고 또 한 번 놀란 둘은 반가운 기색도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다가온 추억을 즐길 새도 없이 카게야마는 모처럼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계셨어요?”

  “응. 살이 좀 빠졌네. 괜찮아?”


 카게야마를 마주하기 무섭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들여다보는 아즈마네는 물론 언제 보아도 어른스러운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안부를 물었다. 카게야마에 관한 기사는 이미 다 읽었을 텐데도 그는 모르는 척 가벼운 화두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게야마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네. 괜찮아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다행이라 말하는 두 선배를 번갈아 보던 카게야마는 문득 마른 목을 축이듯 이름 하나를 꺼냈다.

 

  “스가와라……선배는요?”


 카게야마 입장에서는 쭉 생각했던 이름이었지만, 그들 처지에서는 꽤 뜬금없었는지 약간의 어색함이 정적에 섞였다. 아즈마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일 때까지 사와무라는 말을 고르는지 잠시 입을 꽉 닫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스가는 후쿠오카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아.”

  “후쿠오카요?”

  “……아사히.”


 카게야마는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반문했고, 사와무라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봤자 엎질러진 물이었다.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기에 설명을 필요로 하는 카게야마의 표정을 확인한 사와무라는 유난히 마르는 입술을 입안으로 한 번 축이고서야 간결하게 입을 뗐다.

 

  “스가는 그, 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후쿠오카에서 지내고 있어.”

  “그렇군요.”


 한결 누그러진 대답에 사와무라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즈마네는 잔뜩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트렸으며, 카게야마는 바짝 긴장으로 굳은 제 어깨를 살짝 주무르면서 후쿠오카 한 단어만 머릿속에 박아 새겼다. 문득 시선을 의식한 카게야마는 저조차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음을 감추듯 그럴듯한 핑계 하나를 조악거렸다.

 

  “그, 졸업 끝나고 정식으로 도쿄에 올라가서 연락드렸는데, 한 번도 받지 않으셨거든요. 학교도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고 전해 듣기만 하고…….”

  “아, 응. 3학년까지만 다녔어.”

  “아사히.”


 커다란 몸이 또 한 번 크게 움찔거렸다. 사와무라는 한숨을 마무리 짓고서 카게야마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서 고개를 끄덕인 카게야마가 저를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먼저 목례를 건네고 몸을 돌릴 때까지 사와무라도 아즈마네도 스가와라에 관한 이야기를 더 덧붙이지는 않았다.





 완연한 봄기운이 무색하게 밤은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올해의 봄도, 6년 전의 봄에도. 

 부쩍 좁혀드는 제 어깨를 쓱쓱 문지른 카게야마는 더 두꺼운 옷을 입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잠시간 고민했다. 이윽고 그 이유를 핑계로 집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주머니 속 애꿎은 편지 끄트머리를 조물거리던 카게야마는 제법 눈부신 조명의 호텔 내 로비 카페에서 어렵지 않게 편지의 발신인을 찾았다.

 빈 잔이 두 개, 그리고 반쯤 비운 찻잔이 한 잔. 스가는 그것들을 치울 여력도 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펼쳐 든 책 가운데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카게야마가 곁에 다가온 기척도 느끼지 못한 그는 한숨을 쉬다가 찻잔을 만져보다가 다시금 책에 집중하려 애쓰는 모양새였다.


  “스가와라 선배.”

  “카, 게야마! 언제, 언제 왔어?”


 처음은 반사적으로, 그다음은 당황으로 물든 목소리가──아아, 진짜 엉망이야. 라며 자책을 담아 테이블 위로 스러졌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옅은 미소조차 띠지 못한 채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 앉아.”


 짧은 자책을 끝낸 스가와라가 먼저 권할 때까지 서 있던 카게야마가 그제야 그의 건너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유난히 건조한 목울대를 움직이다가 짧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 스가와라가 서둘러 상체를 일으켜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다른 손으로 직원을 불러 미지근한 물을 쥐여줄 때까지 카게야마는 코가 매운 잔기침에 눈물을 쏙 빼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 차례, 아니 두 차례의 사단이 끝나가고서 온연히 둘만 남은 테이블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불러낸 스가와라는 물론 부름에 응한 카게야마도 생각했던 말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서 또다시 말을 생각했다. 말, 무슨 말, 어떤 말, 무엇에 대한 말, 멍한 상념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하던 말들을 스가와라는 하나씩 주워 짜 맞추기를 포기했다.


  “나와줬구나.”

  “네.”


 건조하고 쓴 입맛을 억지로 꿀꺽 삼켜가며 스가와라는 웃었다. 대답을 하고 눈을 마주쳐오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저 자신에게 자조한 스가와라는 다음 말을 떠올리려는 순간, 목이 메었다.

 고마워? 미안해? 왜 왔니?

 저 세 가지의 표현 중 그 어느 방향도 상정을 돕지는 못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스가와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대차게 적어 내려갔던 편지 때와는 달리 주춤거리며 눈을 돌리기 바빴다.

 도대체 이게 다 뭐라고. 지근지근 끓는 이성이 마음을 비웃었다. 뭘 바라고 그를 불러낸 거냐고,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거라면 이미 충분하다고. 한 번 물꼬가 트이자 거세게 몰아세우는 이성은 합리화를 거부하고 스가와라 자체를 멸시하고 꼬집었다. 그리고 아픈 자국은 눈물을 쏙 빼고도 남았다.

 제가 불러놓고, 제가 말을 걸어놓고, 홀연히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스가와라는 애써 숨을 삼키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흐르면 안 된다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버티던 스가와라의 건너편에서 약간 큰 기척이 일어났다. 카게야마가 그냥 돌아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법이 없지만, 그래도 보내고 싶지 않은 욕심이 곧장 고개를 들도록 만들었다.


  “스가와라 선배 방으로 갈까요? ……아뇨. 이상한 뜻은, 절대로, 아니고, 그편이 선배가 더 편하실 것 같아서.”


 아무리 보아도 카게야마 나름대로 기울여 준 씀씀이가 다시금 눈물샘을 왈칵 건드려왔다. 스가와라는 억지로 숨을 더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이 눈물 몇 방울이 떨어진 것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보지 못했으리라 일부러 일어나면서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든 스가와라는 겨우 웃어 보였다. 

 언제나 스가와라가 이끌었던 자리에 카게야마가 있었다. 오롯이 둘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생소한 감각이 카게야마를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스가와라는 점차 굳어가는 긴장을 다스리지 못했다. 

 부쩍 찬 기가 도는 제 손을 꾹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시시각각 층수가 올라가는 작은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유독 빠르게 열리는 착각에 마른침을 삼킨 스가와라가 먼저 앞장섰다. 안주머니에서 호텔 카드키를 찾아 쥐고서 잠시간 망설이던 스가와라는 돌연 몸을 돌려 뒤따라온 카게야마를 마주 보았다. 

 동그래진 눈동자를 오랜만에 마주하는 감상 따윈 접어두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찰나가 감격스러운 나머지 스가와라는 눈물을 참는 방법을 잠시 잊고 말았다.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를 비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확장된 동공에는 설핏 놀람과 당혹 그 자체였다. 결국, 스가와라는 지금 당장을 수습하기보다 눈물을 참지 않기로 했다. 

 이 상황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자연히 눈을 마주칠 자신조차 사라졌다. 먼저 시선을 떨군 스가와라의 위에서 카게야마는 눈을 돌리지도, 책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얕은 한숨이 드나들며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이 좀체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울지 마세요.”


 지극히 카게야마다운 위로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눈앞에 선해서 스가와라는 떨어지는 눈물의 커튼 뒤로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포기하기를 마음먹기 무섭게 차갑게 식던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이야기도 말로 할 수 없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리…잖아.”

  “……네?”

  “이러면, 이러면 내가 기대해버리잖아.”


 꽉 막힌 이물질을 토해내듯 터져 나와버린 원망은 분명 스가와라 자신에게 향한 말이었다. 카게야마를 탓하면서도 볼썽사나운 기대에 최대한 끌어모은 이성으로 끼얹은 찬물이자, 단호하게 그은 선이었다. 더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을 틀어잡은 채 스가와라는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무시하고 고개를 저었다.


  “알아, 알아. 미안해. 부담스럽지?”


 식은땀이 고이면서도 손끝에서부터 넝쿨처럼 타고 올라오는 한기를 모른 체하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 이상 카게야마에게 그 손을 닿게 두어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멀어진 거리에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스가와라가 무너질 듯한 신체를 벽에 기대게 될 때까지 기어코 한 발자국씩 가까워진 카게야마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어디까지나 위로에 가까웠으나 스가와라는 그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스가와라 선배.”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고백한 것 자체가 내 욕심이야. 미안해. 내가 너한테 괜히…….”


 그리고 이번에는 카게야마가 이야기할 차례였다.

 

  “선배, 스가와라 선배.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스스로가 만든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동그란 머리를 제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선배 욕심만이 아니에요.”


 움찔 놀란 어깨를 천천히 토닥이면서 쓰다듬던 카게야마는 아주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거의 치기에 가까웠다.


  “저도, 저도 선배를 욕심냈어요.”


 순간 올려다보는 눈가의 눈물점을 매우 조심스럽게 쓸어본 카게야마는 먼저 허리를 숙였고, 고개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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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

2018년 1월 대운동회에 회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그를 두고 모두가 ‘스가와라’라고 불렀다. 동급생인 사와무라와 아즈마네, 시미즈조차 그를 이름이 아닌 스가와라로 불렀다. 그래서 카게야마 또한 당연히 그를 스가와라 선배로 불렀으며, 그렇게 인식해왔다. 그리고 이제 와 붙은 사족이지만 카게야마의 첫사랑의 이름조차 스가와라였다. 코우시라는 이름이 묘한 벽을 두르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다 여기는 이가 없었다. 카게야마를 포함해서.

 스가와라는 야치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초여름의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표현을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히나타와 츠키시마에게 한동안 놀림당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말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데, 산들 하게 목 뒤를 훑는 바람이 일고, 그 자취를 쫓으려 고개를 돌리면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괜스레 기다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게야마에게는 없는 그런 공기를 갖추었고, 스스로 다룰 줄도 알아서 자연스레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동경이 있었고, 갈망에서 점차 사모로 바뀌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모라는 말이 비약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카게야마는 그 외에 딱 맞는 단어를 사전에서조차 찾지 못했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언제나 우러러보아야 할 상위의 존재였다. 당연한 기실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새 애틋한 그리움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때 즈음해서 스가와라를 포함한 3학년은 입시를 앞두고 부 활동에 완전히 나오지 않게 되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절박했더라면 3학년 교실까지 쫓아가고도 남았을 터였으나 카게야마는 오히려 연습에 더더욱 매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에 엄청난 활력을 선사해주었다. 자연히 저들끼리 붙은 경쟁 열은 예상외로 상당해서 고문인 타케다가 3학년 졸업식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에서야 카게야마는 시간의 흐름을 깨달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벌써 입시가 끝나고 졸업식을 앞에 두고 있었다.

 와닿지 않는 현실감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져서 카게야마는 졸업식 당일 아침에도 그 누구보다 일찍 배구 부실까지 달렸다. 히나타조차 아직 오지 않은 그곳에서 카게야마는 뜀박질로 인해 흘러나오는 열기를 헉헉 되바라진 숨으로 몰아쉬었다. 추운 한기와 섞여 몽글몽글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것을 카게야마는 잠시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짧게 드리워진 안개가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사라졌을 때 카게야마는 무심코 옮긴 시야의 끝에서 익숙한 로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왈칵 울음이 밀려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카게야마는 돌연 터져버린 서러움을 감출 새도 없었다. 눈가에서부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방울은 물론 더운 숨과 함께 토해버린 울음소리가 더욱이 서러웠다.


 “카게야마?”


 문을 닫지 않았던가, 뒤늦은 자아 성찰을 헤아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주인부터 돌아보았다. 추위에 발갛게 물든 양 볼 아래로 두꺼운 하늘색 머플러가 그렇지 않아도 옅은 색소의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 위로 유독 도드라진 눈물점 위로는 놀란 기색이 선연한 눈동자가 이윽고 살포시 웃음을 품고 있었다. 스가와라였다.


 “스…….”

 “카게야마?! 너 울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고 부르려던 이름은 기어코 멘 목에 완성되지 못했다. 대신, 아까보다 한층 더 놀란 목소리가 카게야마에게 집중되었고 얼른 다가선 체향은 무던히도 잊으려 노력했던 그립고 애틋한 마음 그대로였다. 그 덕에 갑자기 열 살짜리 꼬마아이라도 돌아간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버티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이상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상담해줄 수 있는 거야?”


 얼른 목소리를 죽여가며 부실의 문까지 꼭꼭 걸어 잠근 스가와라는 눈으로만 카게야마의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이미 엉망이 되었을 얼굴부터 두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다리까지 대충 훑어보고 나서야 약간 안도를 내비쳤다. 그러더니 다시금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혹시 우리가 가는 게 슬퍼서 우는 거야?”


 울컥, 다시금 차오르는 무언가에 목울대를 크게 울린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환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머리를 조심스레 토닥여주었다. 정말로 아이 어르듯 상냥한 손짓에 불만과 설움이 한데 섞인 눈초리가 스가와라를 겨우 마주 보게 했다.


 “고마워. 카게야마.”


 제 키보다 훨씬 높은 언저리에서 토닥이던 손을 내려 카게야마의 볼과 눈 주위를 꼼꼼히 쓸어준 스가와라는 오히려 제 눈을 슬며시 적시곤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렇게 둘은 졸업식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부실에 웅크려 앉아 한참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카게야마가 스가와라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자신의 졸업식이었다.

 2년이었다. 딱 그만큼의 공백이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졸업식이 막 끝나 어지러운 교정을 쉬이 떠나지 못해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 날과 같은 날이었고, 같은 공기였다. 다시 1학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만끽하며 카게야마는 선연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겨울 하늘에 덧그려보았다. 후배들과 동급생들이 인사를 건네고 가는 뒷모습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카게야마는 마냥 그렇게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 날처럼 제 뒤에서 자신을 불러줄 스가와라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카게야마?”


 그리고 닿은 숨결은 카게야마의 기도가 이뤄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기다리던 마음이 행동으로 용수철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돌아본 시야에서 스가와라는 어느새 텅 빈 교문을 배경으로 빙긋 웃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너 여기 있을 거라고 알려줬거든.”


 잘게 터트린 웃음소리가 프리즘에 반사된 빛처럼 여러 빛깔로 반짝였다. 절로 입매에 힘이 풀려 겨우 웃어버린 카게야마는 막상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하지 못해 횡설수설했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트린 시선을 비집고 유독 빨개진 손이 들어왔다.


 “가자. 모두 기다리고 있어.”

 “선배, 는요?”


 불쑥 튀어나온 물음은 카게야마 본인도 놀랄 만한 것이어서, 스가와라의 침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저 혼자 펄쩍 뛰려던 부정을 스가와라가 더 빨리 낚아채었다.


 “응. 나도 기다렸어.”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그다지 센 힘이 아닌데도 카게야마는 마치 끌려가는 양, 스가와라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꼭 잡힌 손을 슬며시 맞잡으면, 하얀 손은 유달리 더 차가워졌다. 얼마 없는 온기를 나누듯 카라스노 배구부의 재림을 선봉했던 얼굴들이 있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맞잡고 버텼다. 그 끝자락에서 스가와라는 잠시 어물거리던 침묵을 먼저 깼다.


 “졸업 축하해.”

 “…감사합니다.”


 카게야마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주머니에 바스락 찔러 들어온 것은 건조한 종이 소리였다. 놀란 눈동자를 추스를 새도 없이 카게야마는 어딘가 잔뜩 긴장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스가와라를 눈에 담았다. 이게 뭔가요? 혹은 무슨 일이 있나요? 상반된 질문을 동시에 떠오른 귓가로 스가와라는 평소보다 한 단계 더 낮은 목소리를 속삭였다.


 “나중에 혼자 읽어.”


 매우 멍청한 얼굴이었을 카게야마를 힐끗 곁눈질하곤 예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씩 걸며 스가와라는 이미 한창 물이 오른 카라스노 배구부 모임에 몸을 실었다. 정신없이 자신들을 반겨오는 소리가 음 소거되는 기현상 속에서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입술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나중에.’


 그리고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는 카게야마가 잘 아는 스가와라 선배였다. 급격히 축축해지는 손으로 주머니 속 편지를 조심스레 훑어본 카게야마는 그 날 처음으로 마셔보는 술을 거의 독채로 들이부었다. 당장 편지를 뜯어보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기 위한 나름의 일환이었다.

 만약 화장실을 핑계로 잠깐 빠져나와 기어코 그 자리에서 몰래 뜯어보았다면, 카게야마는 다른 의미로 참지 못하고 스가와라의 손을 잡아끌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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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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